'한국 영화의 큰 별' 고 강수연의 빈소가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져있다.

'한국 영화의 큰 별' 고 강수연의 빈소가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져있다. ⓒ 고 강수연 배우 장례위원회


대한민국 대중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전설의 여배우 강수연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기와 작품들을 사랑했던 대중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강수연은 지난 7일 오후 3시 향년 56세 나이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 5일 오후 강남 압구정동의 자택에서 뇌출혈로 인한 심정지 증세를 보이며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미 병원에 도착할 당시 상태가 위중하여 수술조차도 받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이들이 쾌유를 빌었으나 안타깝게도 강수연은 끝내 눈을 뜨지 못하고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오는 11일이다.
 
강수연의 부고 소식에 영화계와 연예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강수연의 연기 복귀작으로 후반 작업중이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정이>는 그녀의 유작이 됐다. <정이>의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은 SNS 계정을 통해 "한국영화 그 자체였던 분. 선배님 편히 쉬세요. 선배님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넷플릭스 역시 이례적으로 공식입장문을 내고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였던 빛나는 배우, 항상 현장에서 멋진 연기, 좋은 에너지를 보여 준 강수연 님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좋은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모든 순간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밖에도 많은 배우들과 영화계 관계자, 연예계 동료 선·후배가 강수연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내며 같이 슬픔을 나눴다.
 
강수연은 현대 한국 영화와 대중문화사에서 결코 빼놓을수 없는 존재다. 4살 때 아역배우로 시작하여 하이틴 스타를 거쳐 성인 배우로 성장한 1980년대에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원조 월드스타'였고, 1990년대에는 주체적인 현대 한국여성의 변화를 대변하는 캐릭터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당대의 명품 여배우로 자리잡았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사극 <여인천하>를 통하여 시청률 1위와 방송사 연기대상까지 석권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미 30대 초중반에 배우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다 이루고 전설이 됐다.
 
아역 시절부터 이미 방송가에서는 유명한 배우였지만, 강수연을 확고한 스타덤에 올렸다고 할 만한 최초의 작품은 KBS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1986)다. 강수연은 1기의 여주인공으로 강원도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 온 유현수를 연기하며 청순한 미모와 순박하면서도 발랄하고 씩씩한 고교생 역할을 매끄럽게 소화해내어 호평받았다. 역시 하이틴스타였던 손창민과는 이후 성인 배우가 되어서도 <고래사냥2>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여러 작품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다. 강수연은 <고교생 일기>로 백상 예술대상 TV 부문 여자 신인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강수연은 1985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에서 사고로 기억을 잃은 소매치기 영희를 연기하며 본격적인 성인 연기자로 도약했다. 사실 이보다 앞서 고교생 시절이던 1983년 <약속한 여자>에서 벌써 성인 캐릭터를 소화할 정도로 동세대 중 배역의 폭이 넓은 유망주 여배우로 꼽히던 상태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영화 출연에 집중하면서 본격적인 강수연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한국 영화의 도약기이기도 했다. 강수연이 한국 영화사에 남긴 가장 큰 상징적인 의미는,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한국 여배우로는 최초로 본상을 수상하며, 당시만 해도 국제영화계에서 변방 취급받던 한국 영화계가 작품성과 연기력으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데 그 물꼬를 텄다는 데 있다.
 
강수연은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한국 배우 최초로 당시 세계 4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베네치아, 이탈리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어 1988년에는 낭트(프랑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1989년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잇달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내며 20대 초반의 나이에 세계적인 여배우로 인정받았다.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게임>과 윤여정-BTS가 등장하기 훨씬 전, 아직 한류라는 용어조차 나오지 않았던 1980년대에는, 한국 대중문화가 내세울 수 있는 아이콘하면 강수연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언론에서 붙인 '월드스타'라는 수식어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국 컨텐츠와 배우가 세계무대로 나간다는 것을 아직 상상도 하기 어렵던 시절, 강수연이 한국영화의 국제 위상과 품격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당시 강수연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나게 파격적이다. 강수연의 최대 인생작으로 꼽히는 <씨받이>에서 조선시대 양반집에 대리모로 들어간 뒤 버림 받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여성의 삶을 연기했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21세였다. 순박하고 당찬 철부지 소녀에서, 성과 사랑에 눈을 뜨는 여인이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강제로 아이를 빼앗긴 모성의 처절한 설움까지, 가부장적 질서에서 억압된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며 세계영화계의 극찬을 받았다. 지금 현재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나이의 강수연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과 또다시 호흡을 맞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는 기구한 가정사와 속세의 아픔을 겪으며 불가에 귀의하게 되는 여승 순녀를 맡아 <씨받이>의 옥녀 못지 않은 비극적인 캐릭터를 또다시 훌륭하게 소화했다. 무엇보다 요즘도 미모의 젊은 주연급 여배우들이라면 대부분 꺼려할 만한 '노출'이나 '삭발'도 기꺼이 불사하는 연기 투혼을 보여준 것도 인상적인 대목. 황색 연예언론에서 종종 이를 가십성 소재로 다루기도 했지만 강수연은 오직 연기력과 작품성으로 정면돌파에 성공하는 뚝심을 보여줬다.
 
강수연의 넓은 연기폭과 도전정신은 지금 봐도 독보적이다. 그녀의 연기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87년-1991년 사이에는 매년 3~4편 이상의 영화에 활발히 출연했는데, 이 기간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 같은 작품성으로 인정받은 영화에서부터, 로맨틱 코미디의 히로인, 사극의 팜므파탈, 치정멜로극의 자유분방하고 속물적인 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품에서 개성넘치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순박한 시골소녀를 연기한 <씨받이> <감자>, 희대의 요부 장녹수를 소화한 <연산군>, 당차고 거침없는 말괄량이 여대생 미미를 연기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모두 같은 해인 1987년에 개봉한 작품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작품에서 전혀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고, 스타급 여배우라면 이미지 관리상 꺼려하거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난이도의 연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 시기의 강수연은 연기력과 작품성, 국내외적인 명성과 인지도 면에서 비교할 만한 라이벌도 없는 한국 영화계의 독보적인 원톱 여배우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경마장 가는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대안의 블루> <웨스턴 에비뉴> <처녀들의 저녁식사> <송어>등 현대극 위주로 활동하며 대중성보다는 이른바 호불호가 엇갈리는 '문제작'으로 꼽히거나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에 자주 등장했다. 1980년대까지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에 희생당하거나 좌절하는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30대에는 이를 극복하고 개인적으로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 여성의 변화상을 표현해냈다.
 
다만 이 시기에 접어들며 대중성 면에서는 흥행작이 많지 않았고 연기활동도 1980년대에 비하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최진실, 심혜진, 김혜수, 전도연 등 각기 다른 매력과 폭넓은 연기력을 갖춘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이 잇달아 등장하며 영화계에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사실 강수연은 실제로 이들과는 동년배이거나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았지만 아역 시절부터 워낙 오랫동안 연기활동을 해왔고 성숙하고 진지한 캐릭터를 자주 맡은 탓에 자연스럽게 한 세대 위의 선배같은 이미지가 형성됐다.
 
 '한국 영화의 큰 별' 고 강수연의 빈소가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져있다.

'한국 영화의 큰 별' 고 강수연의 빈소가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져있다. ⓒ 고 강수연 배우 장례위원회


2001년 강수연이 오랜만에 TV로 돌아온 SBS 드라마 <여인천하>는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인 동시에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작품으로 기억된다. 14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강수연은 실존인물이자 희대의 악녀인 정난정 역을 열연했고 드라마는 최고시청률이 35%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강수연은 이 작품에 출연하며 회당 출연료 500만 원을 받아 당시 최고 출연료를 기록했고, 같이 공연했던 문정왕후 역의 전인화와 2001년 SBS 연기대상을 공동 수상했다. 지금도 중장년층 팬들은 강수연하면 이 작품을 먼저 떠올리는데, 매회 강수연의 클로즈업된 얼굴로 막을 내리는 클로징 연출도 유명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영화계에서 입지가 주춤했던 강수연에게 예전의 명성이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며 성공적인 재기를 이끌어준 작품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강수연에게는 이 작품이 그리 좋은 기억으로만 남지는 않았던 듯 하다. 50부작으로 기획됐던 드라마는 높은 인기에 힘입어 150부작까지 연장되며 억지스러운 전개로 드라마의 완성도가 급락했고, 강수연은 빡빡한 촬영 스케쥴과 원치 않은 캐릭터의 변화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수연은 이후로 한동안 사극과 드라마 출연 섭외를 모두 거절하며 <여인천하>는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하사극이 됐다.
 
<여인천하>를 끝으로 2000년대 이후 강수연의 연기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2006년에는 영화 <한반도>에서 명성황후 역으로 오랜만에 사극에 복귀했지만 분량이 짧은 특별출연이었다. 2007년에는 MBC 주말극인 <문희>를 통하여 6년만에 드라마로 복귀했지만 시민단체가 선정된 그해 최악의 드라마라는 오명을 쓰고 시청률도 저조했다. 2010년대에는 단편영화 <주리>에 출연한 것을 빼면 연기활동이 전무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영화계와의 끈은 놓지 않았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심사위원·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2015~2017년에는 국내 여배우로는 최초로 여성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다수의 해외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활약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행정에서의 업적이나 심사위원으로서의 안목 면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강수연은 2022년들어 연상호 감독의 SF 드라마 <정이>로 오랜만에 연기활동 재개를 앞두며 기대를 모았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뇌 복제를 책임지는 연구소 팀장 서현 역을 맡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작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됐다.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점은, 강수연이 배우로서 한창 원숙기에 접어들 30대 중반-40대의 나이에 활동이 부진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강수연의 활동이 뜸해진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는 본격적인 르네상스기에 돌입했고,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류열풍에 힘입어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음악을 아우르며 세계에 K-컨텐츠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강수연은 고전적이고 우아한 비련의 여인상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면서 때로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현대 여성까지 폭넓은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과 아우라를 두루 갖춘 여배우였다. 오늘날로 치면 김혜수-김서형 같은 개성파 여배우들에게 떠올리는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하고 멋진 언니' 캐릭터의 원조는 강수연이었다. 한국 영화-드라마 시스템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여배우들이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폭이 훨씬 넓어진 요즘이었다면 강수연의 연기력과 스타성은 더 많은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50대 중반은 여배우에게도 더 이상 많은 나이가 아니다. 한 세대 위의 대선배인 윤여정이 젊은 날의 강수연처럼 데뷔 초기에는 강렬하고 파격적인 캐릭터로 주목받았다가, 오랜 공백기를 거쳐 60-70대에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좋은 모범이었다. 강수연도 지금 윤여정의 나이만큼의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아직 해야할 일도 보여줄 매력도 충분한 배우였기에 너무 이른 작별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강수연은 아역시절부터 평생을 연예계-영화계에 몸담았고, 스타들의 톱스타이자 롤모델로 꼽혔지만 유명인으로서 흔한 구설수나 스캔들 한 번 없었을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오히려 차갑고 도도해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주변인들을 잘 챙기고 배려할 줄 아는 인품으로 유명했다. 영화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높아서 훗날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서 주인공의 대사로 등장하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자존심)가 없냐"라는 어록의 원조가 강수연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별세에 진심으로 애도하고 눈물까지 흘리는 것은, 단지 우러러보던 스타 강수연을 넘어서 '인간 강수연'이 남긴 아름다운 추억에 대한 존중과 공감대 때문일 것이다. 강수연은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작품과 명연기,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도전정신은 영원히 팬들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강수연 씨받이 여인천하 강수연출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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