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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출범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다시 한 번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의소리(VOA)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즉각적인 전작권 환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다.

인터뷰에서 윤 당선인은 "일단은 우리가 상당한 정도의 감시·정찰·정보 능력을 확보해서 연합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정보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어느 정도의 감시정찰 자산을 확보하고 그 시스템을 운용해야 되는데 그 준비가 좀 미흡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즉각적인 전작권 환수에 사실상 반대를 드러냈다. 그는 "우리가 준비되면 미국도 작전지휘권을 한국에 넘기는 것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당선인의 발언을 보면서 새삼 광복군의 통수권(지휘권)을 돌려받고자 고군분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군대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설됐다.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우리만의 독자적 군대를 갖는 것은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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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쁨도 잠시, 1941년 11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체결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이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군이 접수하겠다는 것으로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매우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9개준승'의 핵심 조항들을 살펴보면 '광복군은 중국의 항일 작전 기간 중에 있어서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 직속하고, 참모총장에 의하여 장악 운용된다', '광복군이 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아 중국에서 항전을 계속하는 기간 및 한국 임시정부가 한국 경내로 진입하지 못한 이전에는 중국 최고 통수부의 유일한 군령을 접수할 뿐이요, 기타의 군령이나 혹은 기타 정치적 견제를 접수할 수 없다'는 등 하나 같이 임시정부의 주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들 뿐이었다.

당연히 임시정부 내에서는 격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중국 땅에서 그들의 원조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마냥 거부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인통접수(忍痛接受: 고통을 참으며 받아들임)'의 심정으로 일단 수용했다.

그러나 '9개준승'을 수용했다고 해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9개준승'을 받아들인 직후 임시정부는 "광복군과 본 정부와의 고유한 종속관계는 의연히 존재하며 대한민국 국군된 지위는 추호도 동요됨이 없는 것이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광복군 대원들에게 임시정부의 건국강령(建國綱領)과 지도정신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한국광복군 공약(公約)' 및 '한국광복군 서약문(誓約文)'을 잇달아 제정·발표했다. 비록 광복군이 중국군에 예속되었다고는 하나 내부적으로는 '자주성'을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광복군 공약(公約) 및 서약문(誓約文). 1941년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차리석(車利錫) 위원이 제출한 것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제정됐다.
 한국광복군 공약(公約) 및 서약문(誓約文). 1941년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차리석(車利錫) 위원이 제출한 것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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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준승'을 취소하기 위한 논의도 계속 이어졌다. 1942년 10월 개원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주로 야당(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9개준승'을 받아들인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이를 개정 내지는 취소해야 한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재밌는 사실은 추궁을 받는 정부 역시 야당의 이런 주장을 오히려 반갑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당시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趙素昻)은 "이 의회를 이용해서 광복군을 경정(更正: 바르게 고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라며 야당의 불만을 역이용하여 중국 당국에 '9개준승'의 취소를 요구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이는 여야 할 것 없이 당시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우리 군의 통수권만큼은 우리 정부가 갖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임시정부의 '9개준승' 취소 요구에 중국 당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에 1943년 10월 개원한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중국이 '9개준승' 개정을 거부한다면 임시정부가 일방적으로 폐지를 선포해야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우리의 정신까지도 죽어가지고야 어떻게 독립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외에 나올 때도 9개준승을 받으러 왔습니까. 이 자리에서 죽어도 또 망국노 노릇을 못하겠습니다. (…중략…) 광복군이 근무병 하나도 마음대로 처리 못할 만큼 인사문제의 자유가 없어가지고서야 무슨 일할 자유가 있습니까. 부모처자를 버리고 여기 와서 고생하는 여러분이 이런 꼴을 당하자고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신만은 살아야겠습니다." - 1943년 11월 15일 문일민(文逸民) 의원의 발언 中

발언 직후인 1943년 12월 1일 문일민 의원은 유림(柳林)·강홍주(姜弘周) 의원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장 앞으로 '9개준승' 폐지와 함께 임시정부가 광복군 통수권을 행사하도록 새 군사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제의안을 제출했다.

꿈쩍도 하지 않던 중국 당국은 임시정부에서 이처럼 강경한 행보를 보이자 당혹감을 느꼈다. 자칫 그동안의 원조마저 무위로 돌아갈까 우려한 중국 측은 전향적인 태도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8월 23일자로 임시정부에 '9개준승'의 취소를 통보해왔다.

임시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광복군 운영에 소요되는 각종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차관 제공을 요구하며 구체적인 액수까지 제시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참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당당한 요구였다.

임시정부의 끈질긴 요구에 1945년 4월 중국 당국은 광복군에 차관 제공을 결정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결기에 중국 당국도 두 손, 두 발을 다 든 셈이었다.
 
인도 버마전선에 파견된 광복군 대원들
 인도 버마전선에 파견된 광복군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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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국가 지도자로서 당당하게 요구할 건 요구해야

오늘날 북핵 위기 속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날로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동맹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 이번 윤 당선인의 발언을 보면 한미동맹을 중시한답시고 우리 군의 지휘권을 돌려받는 당연한 요구 앞에서조차 동맹국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의 나라 땅에 얹혀 살며 독립운동하던 그 시절에도 우리 군의 지휘권만은 우리가 행사하겠노라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는 '우리의 정신까지도 죽어가지고야 어떻게 독립하겠는가'라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당당한 외교안보정책이라고 말하려면 이 정도 결기는 보여야 하지 않겠나.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아서 윤 당선인의 발언을 들었다면 과연 뭐라고 했을까. 아마 '정신만은 살라!'고 일갈하지 않았을까.

이제 하루 뒤면 윤석열 당선인은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전작권 환수는 자주국방 달성을 위한 첫 걸음이다. 부디 윤 당선인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결기와 정신에서 느끼는 게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주요 참고문헌: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태그:#윤석열, #전시작전통제권, #전작권, #문일민,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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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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