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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가 해제되자마자 모여든 친구들. 비빔밥 점심을 나누고 커피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한 친구가 불쑥 던진 한 마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에는 유효기간이 있는 거 같아.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야."
"결혼의 유효기간? 그건 30년이야."


다른 친구가 딱 잘라 말한다. 평소 '한지붕 별거'를 부르짖던 그녀다.

"말도 안 돼. 무슨 근거라도 있어?"

유난히 사이 돈독한 남편을 둔 한 친구가 즉각 저항한다.

"하하. 잊으신 모양인데, 결혼은 사회계약이랍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나 부부일심동체 같은 건 다 뻥이야. 30년이면 아이들 다 키워 내보내게 되잖아. 의무복무기간이 끝난 거지. 그다음엔 이 계약을 연장할지 말지, 제 각각 결정해야 돼."
 
동네 텃밭 고수의 오두막 앞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가드닝 기술을 전수받는 건 텃밭놀이의 제일 큰 재미다.
 동네 텃밭 고수의 오두막 앞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가드닝 기술을 전수받는 건 텃밭놀이의 제일 큰 재미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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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재계약? 곧장 불꽃수다가 시작된다. 오늘 모인 다섯 중 남편을 인생 절친으로 삼은 친구는 둘. 나머지 셋은 남편과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있는 과정 중이라고 자평한다. 서로의 퇴직 이후, 게다가 코로나19 방역 사태로 강제된 집콕의 현실 속, 자잘한 충돌로 부대끼면서 남편을 점점 낯설게 느끼게 된 게 그 배경.

"아이들 키우고 살림 늘려나갈 때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온갖 재미난 이야기를 했거든. 직장 고민도 서로 들어주고, 진짜 좋은 의논 상대였어. 근데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니까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지더라고. 각자 관심사가 너무 달라진 거야. 내 남편은 요즘 자전거 라이딩밖에 몰라. 난 햇볕에 타는 것도 싫고, 라이딩할 때 입는 옷도 보기 싫은데 말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친구가 나선다.

"내 남편은 날마다 혼술이야. 직장 생활할 적엔 술 많이 마시게 된다고 회식을 싫어하던 사람이거든. 요즘엔 낮술도 자주 마셔. 이러다 알코올 중독 될까 봐 겁난다니까. 내가 하루 걸러 마시라고 했더니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는 거야. 지금 이 사람은 내가 결혼했던 그 남자가 아니야."

'내가 결혼한 그 남자'가 실종된 건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거의 30년을 주말부부로 지낸 사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남편에게 에너지를 낭비 말자

직장관계로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떠난 뒤 남편은 홀로 대구에 남았다. 어릴 적 꿈이었던 별을 보려고 도심의 아파트에서 불빛 적은 사과 골짜기에 집을 구했다. 밤마다 별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다 보니 망원경 수는 어느새 20대가 됐다나.

뭐든 뚝딱뚝딱 만들기를 좋아하니 집 안팎엔 공구와 목재 그리고 크고 작은 기계가 널려 있다. 해외 직구를 포함, 신기한 장비들을 사지 않고는 직성이 안 풀린다. 목공예 강좌부터 용접까지 오만가지를 배우러 다닌다.

웬 꿈은 그리도 많은지 어려서부터 산을 갖고 싶었다며 퇴직 후 청도에 작은 산을 하나 샀다. '자연인 놀이동산'의 탄생이다. 수시로 들락거리다보니 언덕길에서 굴러 발목 골절 등등,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끊이질 않아 온가족을 불안하게 한다.

보통 쓰는 QWERT 키보드가 불편하다며 키보드 글자 위치를 몽땅 재배치하는 자칭 발명가이기도 한 남편. 한술 더 떠 "더 쓰기 편한" 스마트폰 한글과 중국어 키보드까지 만들어 내며 기염을 토한다. 최근엔 시각장애인을 위해 모르스 부호를 변용한 점자를 만들어냈다나. 그치지 않는 '천재 발명가' 행각의 끝은 어디일까?

"천재 놀이 그만 하고 어질러 놓은 방이나 좀 치워요."

매사에 시큰둥한 내가 못마땅한 그는 구시렁거린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과소평가하는 게 바로 당신이오."

그럴지도 모른다. '자기몰입형 인간'이 돼가는 늙은 남편을 꼴 사나워하는 마누라 눈치를 보느라 그 자신도 불편할 테니까. 뇌구조의 차이로 남편과 그 어떤 취미도 공유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나. 그렇다고 한숨만 쉴 수 있나? 남편의 온갖 놀이 활동에 눈을 찌푸려가며 비난하는 건 내 에너지 낭비다. 오히려 '자기몰입형' 남편을 둔 현재 상황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게 이롭다.

꼴리는 대로, 자유롭게 살테다

나는 밖으로 나온다. 친구들과 논다. 옛 학교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 동네 이웃들이 내 친구들이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텃밭을 가꾸고 스페인어를 배운다. 서로 집으로 초대해 밥을 같이 먹는다. 함께 걷고 춤추고 영화 보고 여행을 간다.

통계청의 인구 통계 상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75세 생존 확률은 54퍼센트란다. 그러니까 나랑 놀아주고 밥을 같이 먹어줄 친구가 75세까지 반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기쁘다. 지금부터 75세까지 가열차게 더불어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80세가 되면 생존확률은 30퍼센트, 85세 생존확률은 15퍼센트로 떨어진다. 친구들보다 내가 먼저 떠나서 그들을 외롭게 하든지, 아님 놀아줄 친구가 적어진 내가 외로워질 게 확실시 된다. 그러니 더욱 친구들을 아끼고 귀하게 대접하기로 굳은 결심 중이다.

학창시절, 우리는 서로 경쟁하고 질투했다. 직장 인사고과에서 동료에게 물 먹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이제 우리는 경쟁하고 질투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얼굴만 봐도 좋다. 서로 공유하는 한 시대가 있기에 대화는 풍부하다. 오랜 동료의식은 우정으로 동지애로 바뀐 지 오래다.

우리는 안다. 함께 놀아줄 친구 확보가 노년기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우울할 때 친구 만나 밥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면 좀 견딜 만해진다. 친구는 우울증의 예방약이자 치료제. 결국 명랑 노년의 핵심 자산은 친구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서로 장수 촉진 활동을 벌인다. 강화 사는 친구는 잔병치레 잦은 친구에게 강화인진쑥뜸세트를 보낸다. 무릎연골 보충제 정보를 나눈다. 코로나를 앓고 난 친구에게 줄 종합비타민을 가져온다. 누구도 일찍 죽지 못하게 서로 방해하기로 맹세한다.

결혼의 유효기간이 끝나더라도 즐거운 우정의 시대가 기다리는데 무엇이 서운 섭섭할까? 결혼의 유효기간 30년을 주장하던 친구가 말한다.

"결혼의 유효기간이 끝나도 이상하게 의리는 남는 거 같애."

다른 친구가 맞장구를 친다.

"맞아. 더 나이 들어서 남편이 아프면 돌봐줄 생각이야. 일종의 전우애 비슷한 감정? 잘난 척 할 때는 얄미운데 속알머리 빠진 거 보면 왠지 측은하거든. 나, 이러다 보살되는 거 아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남부럽잖은 금슬을 과시하든, 한지붕 별거나 졸혼, 또는 나처럼 간헐적 별거든 이젠 각자 꼴리는 대로 사는 거다. 내 맘에 안 드는 남편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 남편을 뜯어 고치려 애쓰지 않는다. 남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바람에 불행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자유다.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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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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