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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조어(造語)가 "좌파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는 우스운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이 농담 같은 말을 건네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요즘 들어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가 결합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결합이 그저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하다면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를 백치들이 지껄이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해도 상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말도 안 되는 동거는 분명한 정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때는 정권교체기에 맞추어 획기적인 정치적 언어들이 발명되어 포퓰리즘 광풍을 만들어내던 때도 있었다. 그 이름이 경제민주화던 소득주도성장이던 포퓰리즘은 엘리트층을 배제하고 민중을 호명해내는 매력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퓰리즘도 그 유효기간이 지나 부끄러움도 없이 엘리트주의와 함께 배치된다. 실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을 더 이상 10년 주기의 정권교체 시기마다 교차하는 진자 운동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엘리트 기술관료주의가 실패하고 민주주의가 마비될 때에서야 포퓰리즘이 분출하게 된다는 오랜 상식은 무효화되었다. 오히려 둘은 동시에 그리고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인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가 적극 활용한 정치적 지형 역시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윤 후보는 문 정부로 대변되는 엘리트 기술관료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 포퓰리스트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포퓰리즘 전략은 법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를 내세운 엘리트주의와 접합되었다. 

윤 당선인의 인수위에서 예고한 정책들과 인선 역시 동일한 배치를 보여준다. 여가부 폐지 어젠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술관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제지한다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한편 형식적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법률가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경제적 엘리트층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정책들을 제시하는 모습은 엘리트주의적 통치의 성격을 강화한다.

이 같은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대선 후보 한 명을 선택하면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 모두 소비할 수 있는 정치 소비의 시대가 도래한 게 아닌지 싶다. 홍콩 민주화 운동도 여행 패키지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걸 팔아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커피를 마시면 캄보디아 소녀들을 살릴 수 있어요", "우리 회사는 판매 수익의 1%를 기부합니다" 등등 상품은 더 이상 사물의 유용성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와 윤리적 가치, 경험도 함께 판매한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윤리적 부담을 상품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가 하루도 빠짐 없이 전세계적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한 탓에 국제 노동 분업이 한층 더 불평등해지더라도 윤리적 자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상품이 나를 대신해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를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대선기간부터 판매된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는 시민 소비자들이 정권교체를 위해 5~10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즉각 모든 정치적 격동을 미리 경험하도록 해준다. 

윤석열 당선인 덕분에 누군가는 엘리트 법피아들이 실현하는 "법치주의"와 "공정성"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형식 민주주의라는 상품은 소비자 본인이 엘리트가 되지 못할지라도 정치인과 전문가들이 대신 권위주의적 감각을 만끽하게 해준다. 

물론 엘리트주의를 즐겁게 소비할 사정이 못 되는 소비자를 위해서는 반페미, 반장애인, 반 진보시민단체 혐오 정치도 판매하고 있다. 덕분에 누군가는 "우리"의 유토피아를 방해하는 "저들"의 "비문명적인" 갈등조장 행위를 윤리적 부담 없이 마음껏 비난할 자격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시장의 과열된 분위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후유증의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상품은 경제화된 삶 이외의 공간, 즉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절단하면서 등장하게 된 숭고한 사물임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후유증은 점차 누적되고 있을 법도 하다. 동일하게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 역시 사회적 위계로부터 비롯된 적대와 모순을 애써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이 역시 어떤 후유증을 남기고 있지 않을까? 

핵심은 포퓰리즘와 엘리트주의의 결합은 정치의 실패를 가리키는 지점이지 정치의 완결된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가 모든 것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바로 포퓰리즘 대 엘리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필연적인 다음 과제일 수 있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태민님은 인권연대 회원 칼럼니스트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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