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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편집자말]
곁에 있는 이의 사소한 말과 행동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 안아 줄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 덕분에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무릎을 베고 누운 내 귓속을 조심스레 귀이개로 긁어주던 아빠의 손길, 학교에 늦은 줄도 모르고 피아노를 치는 내 곁에서 노래를 부르던 엄마의 고운 목소리, 여름 캠프에서 까만 밤하늘을 가리키며 "저게 은하수란다"라고 알려주던 선생님의 나긋한 목소리. 시간이 흘러도 어딘가에 고여 머물다 자꾸만 되돌아오는 순간들이 있다.

떠올릴 때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기억들. 쓸쓸한 바다에 초록빛 작은 섬처럼 떠 있는 순간들이 삶이라는 고달픈 여정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걸 테다. 그런 순간에 사랑이 자란다고, 그렇게 전해지는 온기로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주는 소설을 만났다.
 
문경민 <훌훌>
 문경민 <훌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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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감자와 양파가 들어간 된장국을 끓여 식탁에 올렸을 때, 할아버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
"맛이, 괜찮구나."
그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주방일이 피곤할 때면 일부러 그 기억을 소환하기도 했다. 언제 되새겨도 반짝이는 기억이었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맛이 괜찮다는 말이 나왔을 때 내 안에 차올랐던 기쁨과 보람은 쓸쓸한 바다에서 만난 초록빛 작은 섬 같았다.
94~95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입양 가족의 삶을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 <훌훌>은 청소년기의 흔들리기 쉬운 감정을 섬세한 문장으로 담아냈다. 지난 시절 내가 겪은 격랑 같기도,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누군가의 아픔일 것도 같아 조심스레 꼼꼼하게 읽게 된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덤덤한 표정 뒤로 숨기느라 무뎌진 감정들이 책을 읽는 사이 호로록 가슴속에서 일어선다.

덮어두곤 했던 애매모호한 기분을 한 올 한 올 세심하게 풀어놓은 문장을 읽는 일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한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어른이 읽어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소설엔 숨어 있다.

스스로를 지키는 어른이 된 아이, 유리

고등학교 2학년 유리는 자신을 입양한 엄마 서정희씨가 떠나버린 집에서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입양,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그런 '과거 따위 없는 셈 치고' 살아가고 싶었지만, 급작스레 전해진 서정희씨의 부고와 그녀의 친아들 연우(초등학교 4학년)와의 만남을 통해 유리의 내면에 과거의 위태로운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런 유리에게도 '시간은 칙칙폭폭 앞으로 나아' 간다. 집안의 속사정이나 학업 등수 같은 예민한 이야기는 조심하면서 유쾌함만은 잊지 않는 친구 미희와 주봉이 언제나 유리의 곁을 지켜준다. 특별활동 모임으로 가까워진 세윤은 자신처럼 입양이라는 과거를 품고 있다. '학교 생활이 이어지고 친구를 만나고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겪'으며 유리는 자신의 처지에 적응한다.

그런데, 그러느라 일찍 성숙해버린 걸까. '우울해 한다고 해서' 조건이 바뀌지 않고, 힘들더라도 '현실을 인정하는 것'밖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음을,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유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다. 보호막이 되어줄 어른이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어른이 된다.

유리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입양한 엄마에게도 버림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자신을 버린 엄마, 연우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던 서정희씨의 삶도, 그 사정을 다 알 수 없으므로 그저 헤아려보려 애쓸 뿐이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나는 내 허벅지에 얹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우의 지난 삶을 생각했고 연우가 살아가며 겪게 될지 모를 무수한 어려운 일들을 생각했다. 목이 메어 왔고 눈물이 돌았다. 엄마 서정희 씨의 삶을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생각했다. - 207쪽 <훌훌> 문경민, 문학동네
 
학교 선생님 고향숙은 힘들어 하는 유리에게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 모두를 향한 것 같기도 하다. 가벼운 호기심과 무심함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비밀을 소홀히 다루지는 않았는지.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데도 진실을 헤아리려는 노력 대신 쉬운 말을 택한 건 아닌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타인의 '깊숙한 곳에 칼 같은 것을 박'는 폭력을 휘둘렀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관심보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남겨 두고, 비밀은 비밀로 덮어두는 세심함이 타인과 나 사이에 필요한 존중과 배려의 적정 온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이 지닌 상처가 크기에 타인의 아픔에도 조심스러운 유리는 가족의 의미를 새로이 그려 내는 존재다. 혈연이라는 뿌리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연결한 뿌리로 가족을 엮어 낼 수 있다고. 자신보다 어린 연우의 끼니와 학교 생활을 챙기고 하나뿐인 딸을 먼저 보낸 후 외롭게 암투병을 하는 할아버지를 걱정하며 유리는 잘려 나간 뿌리를 스스로 키우고 새로이 연결한다.

대학만 들어가면 집을 떠나 혼자 살겠다고 차갑게 마음을 다지던 유리가 연우와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으로 기울어갈 때 유리라는 뿌리가 지닌 생명력이 이 가족에게 싹을 틔우게 할 거라 기대하게 된다. 상처투성이인 연우의 몸과 마음에 새살을 돋우고, 고단하고 어두운 할아버지의 삶엔 빛을 드리울 거라고.

사랑이라는 온기가 '가족'을 만든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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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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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사회에서 결손 가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상에서 벗어난 가족을 그리면서 편견을 지워간다. '입양가족', '부모 없는 아이', '조손 가정'. 하나의 단어로 고정시킬 수 없는 무수한 결이 삶에는 존재함을 <훌훌>은 알려 준다.

또한 누구의 삶도 함부로 규정할 수 없고, 어떠한 조건에서도 사랑은 자란다는 걸 보여준다. 금이 가고 깨어진 자리가 못난 흉터가 되는 게 아니라 선을 잇고 새살을 돋우며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기도 한다는 걸 유리와 세윤, 할아버지와 고향숙 선생님의 삶을 통해 배운다.

입양 가족의 삶은 내게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어딘가에서 힘차게 살아가고 있을 유리나 연우 같은 아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려운 환경에서 불우하게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납작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힘겨운 삶 속에서도 사랑을 키우는 아이들, 아픔을 훌훌 털어내며 씩씩하게 나아가는 용감한 아이들, 상처로 더 아름다운 삶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멋진 아이들이라고.
 
"모든 고통은 사적이지만 세상이 알아야 하는 고통도 있다. 무엇으로 아프고 힘든지 함께 나누고 이야기해야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기 마련이다. <훌훌>이 없는 세상보다 <훌훌>이 있는 세상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254쪽 작가의 말)

작가의 말처럼 <훌훌>이 있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한 뼘 더 넓어졌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문장을 어딘가에서 읽었다. 관계로 고통받으면서도 관계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든다. 온기를 나누며 사랑을 만드는 사람들이 연결될 때 가족은 탄생한다고 <훌훌>은 이야기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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