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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한 달,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만큼 바빴다. 3월에도 2월에도 그랬다. 과연 이것이 좋은 일일까? 4월 마지막 2박 3일, 나에게 실상사 템플스테이를 선물로 주었다. 애썼다. 잠깐 쉬어도 좋다.

며칠을 잠도 못 자고 무리했는지 남원까지 운전하는 길에 졸음이 쏟아진다. 휴게소에서 졸음을 쫓아보려 애쓰지만, 출발하면 다시 졸린다. 실상사에 가겠다고, 3암자 순례길을 걷겠다고, 법인 스님을 뵙겠다고... 쪽잠으로 졸음을 이기는 내가 한없이 가엾다. 자다 가다를 반복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오후 4시에 겨우 도착했다.

종무소 앞에서 법인 스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이제야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 순간 모든 피로가 풀린다. 이 짧은 순간에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위로가 되는구나. 2박 3일을 함께 지낼 휴휴당 식구들과 천왕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법인 스님은 경내를 산책하며 절을 소개해주신다. 삼문, 금당, 탑, 범종각, 요사채, 숙소를 돌아보고, 절 구석에 숨겨져 있는 수철화상탑과 탑비, 증각대사탑과 탑비의 아름다움을 느리게 감상한다.
 
남원 실상사 천왕문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
▲ 남원 실상사 천왕문 남원 실상사 천왕문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
ⓒ 강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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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에서 절하는 예법도 천천히 익힌다. 약사전의 철조여래좌상은 한없이 포근하다. 철로 만든 거대한 검은빛 불상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다니. 법인 스님은 어려운 불교를 쉽게 설명하시는 마법이 있다. 한 시간 동안 경내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지금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더없이 좋다.'

공양간에서 저녁 공양을 한다. 절에서 먹는 내 인생 첫 식사다. 공양간에 들어갈 때 합장반배를 하고, 천주교 신자인 나는 밥그릇을 마주하고 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를 올린다. 공양간에서 성호를 긋는 일이 늘 해오던 일처럼 자연스럽다. 저녁 공양은 품격 그 자체였다. '자연 뜻대로 뭇생명과 더불어 살겠습니다.' 매일 먹는 밥이 이런 의미였구나. 새삼 감사하다. 세상에 절밥이 이렇게나 맛있다니...

저녁 공양 후, 도법 스님과 차담 시간이다. '인드라망 운동' '생명·평화 운동'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한 말씀도 놓칠 수 없이 소중하다. 최고의 가치는 생명이고, 온 우주 삼라만상 생명이 어떻게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왜 나 혼자만의 생명이란 평화란 존재할 수 없는지... 말씀을 들을수록 생명과 평화의 본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풀리지 않는 어려운 그물코가 잘 보인다. 나를 돌아보고, 나를 알게 하는 것, 맞다, 차담이 이런 것이었지.

평생을 생명·평화운동 실천에 바치신 인간 도법 스님의 앎과 삶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다. 휴휴당으로 돌아오는 깜깜한 마당에서 도법 스님의 등불 같은 안목과 철학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더불어 살자'는 당위론의 구호가 난무하는 지금, 모두가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으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스님 눈빛은 그 어떤 말로도 담아내기가 어렵다.
 
실상사 보광전에서 법인 스님의 사찰 설명을 듣고 있다
▲ 경내 산책_실상사 보광전 실상사 보광전에서 법인 스님의 사찰 설명을 듣고 있다
ⓒ 강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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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멀리 보광전에서 들리는 목탁 소리에 잠을 깬다. 새벽 예불 목탁 소리가 따듯한 이불 속에서 자장가처럼 평화롭다. 새벽 절집 마당을 걸었다. 담장 위로 펼쳐지는 색색의 지리산 능선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역시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마당에 느티나무 연두 잎이 바람에 사그락거린다. 대나무 숲에서 새들은 그렇게 조용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침 공양 후, 하루를 여는 법석에 참여한다. 오기 전에는 종교가 다른데 법석은 빠질까 생각했다. 그런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참석했다. 스님들과 활동가들을 보면서 천천히 따라 한다. 마지막 '붓다로 살자' 발원문은 정말 좋다. '아, 이래서 템플스테이가 범종교 수행 프로그램이구나' 깨닫는다.

법인 스님과 실상사 3암자 순례길에 나선다. 스님 두 분이 동행하시고, 마을 활동가분들도 참여하셔서 11명이 함께 했다. 서진암 가는 가파른 길도, 백장암 가는 잔잔한 숲길도 좋다. 이름도 모르는 풀꽃들과 함께 조용히 걷는다. 백장암에서 김밥 점심을 먹고 준비해주신 우롱차에 따듯한 차담이 오고 간다. 오늘 처음 만난 분들과도 이렇게 편할 수 있구나 신기하다.

백장암은 정말 아름답다. 석등과 석탑도 예쁘고, 약숫물 흐르는 긴 도랑도 예쁘다. 백장암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오늘 순례길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눈부시고 여리여리한 연두빛 잎들은 깊은 산 속에서 겨울을 어찌 견디었을까. 봄이라고 이렇게 보드라운 잎들을 내밀어주는구나. 얼마나 애썼을까. 나는 지리산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서진암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았고, 숲길에서 손끝에 새 이파리의 보드라운 촉감을 만지면서 걸었구나.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 미안하고, 미안하다.'
 
실상사 낮은 담장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 실상사 낮은 담장 실상사 낮은 담장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 강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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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먹한 눈물이 핑 돈다. 그냥 산행이 아닌 순례 가이드 법인 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진 순례길이 내게 준 선물이다. 아, 나는 지리산에 무엇을 주고 가야 하나... 마음 한 자락뿐.

한생명 활동가님의 도움으로 마을 산책을 한다. 실상사 농장, 목금토 공방, 느티나무 한생명 매장도 돌아본다. 어느 곳 하나 진심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하는 척'만 하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 시키는 대로, 하던 대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빠른 방법으로 가시적인 성과만 드러나면 되는 세상.

인드라망 산내 공동체 삶의 철학은 달랐다. 모두가 진심을 담고 있다. 내가 모르는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렇게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마음을 다하고 있다. 고맙고, 또 고맙다. 나도 내 자리에서 가장 쉬운 질문부터 다시 해봐야겠다. '나의 業'을 천천히 다시 돌아본다.

저녁 공양 후, 휴휴당 옆 느티나무 아래서 저녁 산책을 한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마음에 잔잔히 들어온다. 법인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다. 한 마디도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다. '실상'의 의미를 여쭈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실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어떤 존재도 현 상태로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없다. 반응과 관계론적인 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존재를 이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상이다. 나의 심상이 만들어 낸 감정, 마음, 느낌은 천성과 본성이 아니라 단지 만들어진 것 뿐이다. 만들어진 것이기에 해체도 변화도 가능하다.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 반응과 심상을 만들어 내듯이 무한한 기쁨과 행복도 생성할 수 있다. 달은 모든 사람에게 뜨지 않는다. 달은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뜬다.'

이토록 어려운 '실상'의 의미를 이렇게 쉽고 명확하게 설명해 주시다니 놀라울 뿐이다. 어제저녁 차담에서 도법 스님의 깊이에 놀랐고, 오늘 법인 스님의 통찰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스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눈앞에 계시는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앎과 삶이 일치하는 고고한 기품이다.

법인 스님이 서울에서 생활하실 때 일화를 들려주신다. 밤늦은 시간 지하철에서 한 남자를 마주하셨다. 술 냄새, 담배 냄새, 삼겹살 냄새에 땀냄새까지 배인 그 사람에게서 악취가 나는데 악취의 역겨움에 앞서 그분의 고단한 하루가 보였다고 하셨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심상이 그려진다. 그 남자의 표정, 곁에서 바라보시는 붓다 법인의 눈빛… 스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마음이 먹먹하여 눈시울이 붉어진다. 눈물을 보인다면 지금 이 말씀이 끊어질 수도 있다.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도로 집어넣는다. 아, 이것이 '실상'이구나!
 
서진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 서진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서진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 강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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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4월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농사일 수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늦은 밤, '5월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4월의 나와 5월의 나는 분명 다른 나이고, 4월의 지리산과 5월의 지리산은 다르기 때문이다. 백장암 주지 스님이 수국을 어디에 심으셨는지도 보고 싶다. 4월보다 더 바쁘게 살아야 하는 5월이 끝날 즈음, 나에게 '5월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를 선불로 선물한다.

도법 스님, 법인 스님, 순례길에 함께 해 주신 일우 스님, 자등 스님, 농사일 수행에 도움 주실 덕산 스님, 구석구석 살펴주신 고마운 자경님, 한형민님, 아기 사슴 밤비님, 2박 3일 함께한 휴휴당 식구들 모두 고맙고 또 고맙다.

집에 돌아와 주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조용한 성당에서 나의 주님께 실상사 템플스테이 후기를 자세히 말씀드린다. 스님이 지하철에서 마주한 그 남자 이야기도, 그를 바라본 스님의 눈빛도 이야기해드린다. 주님 말씀이 '호미를 처음 잡아본 너의 인생도 그 남자만큼 가엽게 살았구나. 법인 스님께 한없이 감사드려라' 하신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는 실상사-서진암-백장암으로 이어지는 순례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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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초등수석교사, <가르침을 멈추니 배움이 왔다>, '배움의공동체 연구회' 회원으로 아이들, 선생님들과 즐겁게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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