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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정원처럼 친근한 산책로
▲ 월명산 산책로 우리집 정원처럼 친근한 산책로
ⓒ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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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편백나무 숲 평상에 누워 책을 읽는다. 단 몇 장이라도 좋다. 이렇게 글과 잠깐이라도 만나는 몇 분이 몇 시간으로 이어지는 독서의 마중물이 된다. 오늘은 정여울 작가의 <끝까지 쓰는 용기>를 들고 나왔다. 작가의 글에 끝까지 '읽는' 용기로 답하고 싶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한 끼 식사의 만족감과는 다른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창고에 곡식을 저장해 놓은 기분이랄까.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추수를 마치면 동네 정미소에 탈곡한 곡식을 맡겨놓고 집에 쌀이 떨어졌을 때마다 방금 도정한 쌀을 몇 가마니씩 가져와 집 곳간에 넣어놓으셨다. 학비를 내야할 때도 쌀을 팔아 공납금을 마련했다. 단 하루도 지체하지 않도록 마감 날짜를 지켜주셨다. 아버지의 할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엄마는 그 쌀로 우리의 용돈도 반찬도 장만했다. 금세 바닥난 쌀가마니를 보고 손 큰 아내를 탓하는 아버지에게 엄마는 당당했다. 돈을 안 주니 쌀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냐며 말문을 막았다.

가마솥에서 풍기는 밥 냄새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구수함이 있었다. 아주 가끔씩 바쁜 엄마를 도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불꽃놀이와 같았다. 볏짚이 타들어가는 동안 옆에 놓아둔 볏짚을 한 웅큼 집어 아궁이 속에 넣으면 사그라들던 불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부지깽이로 살살 뒤적거려 불꽃이 고루 분산되도록 흉내를 내면 제법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추운 겨울엔 그곳이 난로처럼 포근했고 내 두 볼은 불그스레 반짝였다.

쌀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보리를 권장할 때조차 쌀밥만 먹었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검사하는 날이면 친구의 보리를 가져다 내 쌀밥 위에 심곤 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아버지 덕분에 밥만큼은 늘 배부르게 먹었다. 밥은 그렇게 당연하고 평범했다.

환갑을 갓 넘긴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40년. 이제는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시던 소박한 모습. 묵묵히 자기 일을 한 것 뿐이라는 몸짓으로 밥상 앞에 앉으셨다. 쌀 한 톨도 귀하게 다루시던 아버지. 아버지 주머니 귀퉁이는 나락 몇 알이 늘 자리했다. 수확할 때 길 잃은 이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다.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단다."

말이 적었던 아버지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잊히지 않는다. 세상살이에 치여 수없이 상처받았던 마음이 담겨 있는 말이라는 걸 훗날에서야 가늠해본다.

아버지는 어릴 적 양자로 일본으로 건너가 십수 년을 사셨단다. 식민지 시대에 양자는 이름뿐 일꾼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어린 나이에 겪었을 고생과 설움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해방 후 귀국하여 가정을 이루신 아버지는 자녀교육 만큼은 양보하지 않으셨다. 배움은 몸에 남는 재산이라고 하셨고 아버지의 유산이 되었다.

학교공부 하느라 아버지와 단 둘이 이야기 할 기회를 놓쳐서 아쉽다. 대학 3년. 그 날도 아버지는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논을 둘러보다가 쓰러지셨다. 땅을 사랑하셨으니 땅과 있을 때 가장 행복했을까.

자식이 하나 둘 분가하고 내 맘 같지 않을 때. 그 허전함과 실망감을 논에서 달래셨을 아버지. 내겐 호통 한 번 안 하시고 조용하고 따뜻한 음성만 남겨주셨다. 맛있는 불고기를 먹을 때 더 생각난다. 살아 계시다면 이삭대신 자식이 건네는 용돈으로 주머니를 채워드리고 싶다.

평상에 누워 있으니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다. 하늘 위로 뻗은 나무가 구름에 닿아 있고 잎사귀들은 빛을 만나 반짝거린다. 미풍이 어루만질 때마다 속삭이는 소리도 정겹다. 산을 좋아하는 나와 아버지의 땅 사랑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논을 거닐 듯, 아버지랑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하루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및 브런치 게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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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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