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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를 마치고 신용카드를 빼려는데 주유소 직원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다행히 내가 목표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문득 후방거울을 보니 아뿔싸 주유 뚜껑이 혀를 내민 것처럼 열려있었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닫으려는 순간 주유구 마개가 자리를 비운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주유를 마치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미처 주유구 마개에까지 내 빈약한 주의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리라.

다시 유턴해서 주유소로 돌아가는 몇 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뚜껑을 찾지 못하면 내가 방금 피 같은 돈으로 넣은 금싸라기 같은 기름이 공중으로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또 주유구 마개를 잃어버렸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비싸도 좋으니 살 수 없느냐고 자동차 공업사를 찾아갈 생각을 하니 그 자체로 머리가 아득해졌다.

되돌아간 주유소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마개를 발견한 순간 나는 집 나간 자식을 다시 찾은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사소한 물건은 하찮은 물건이 아니다. 사소한 물건이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마땅히 추앙받아야 할 존재다.
 
<설레는 오브제> 표지.
 <설레는 오브제> 표지.
ⓒ 갈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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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작가가 쓴 <설레는 오브제>는 평소 우리가 우리의 가장 사소한 용도와 필요에 종사하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물건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와 깊은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사소한 물건이지만 거대한 역사를 가졌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 통찰로 귀결되며, 무명(無名)의 존재로 시작한 물건이 유명(有名)의 존재로 부상하는 경험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된다.

가령 오직 꿀을 뜨기 위해 탄생했고 존재하는 '꿀뜨개'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통찰을 발견한다.
 
다용도를 내세운 물건의 합체는 불가피하게 물건의 변형을 부른다. 그 변형은 장식적 변주에 그치지 않고 원형을 깬다. 더는 그 물건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그건 물건이 애초에 생긴 목적을 무시하는 처사고, 그건 결국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다. 물건의 변형만큼 시대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 때로는 꿀뜨개 같은 것들을 일상에 추가한다. 시간에 휩쓸리면서 가끔 붙잡고 쉬어가는 말뚝을 박듯이.
 
집주변을 할 일 없이 산책하는 행위에 대한 이런 통찰은 또 어떻고.
 
알다시피 주거지의 면적을 늘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도 동물처럼 산책으로 영토를 넓힐 수 있다. 공적인 장소에 사적인 의미를 심는 일은 나를 확장한다. 거기서 먹이처럼 시적 단상을 모을 수 있다. 매일 경로가 다져지고 샛길이 번지면서 내 서식지가 늘어난다. 그곳은 나만의 감상과 집착과 미련이 묻어 있어서 다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다.

아내가 실론티를 사 왔는데 차 통이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예쁘다. 나는 평소 출근을 하면 봉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며 차는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슬쩍 아내가 사 온 차 통을 보고 브랜드를 기억한다.

그리고 잽싸게 서재에 들어와 아내가 사 온 차를 주문한다. 사무실 내 책상 위에 올려두면 뭔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설레는 오브제>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은 어쩌면 '웰빙'보다 웰빙의 느낌'에 돈을 쓰고 그 기억을 산다. 그게 내용물이 없어진 후에도 용기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같다.
 
 
그리고 차에 얽힌 중국과 영국의 애증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이재경이라는 작가는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사람이고 사람에 대한 통찰도 매우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다. <설레는 오브제>가 한 사람이 쓴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 한 권의 책은 사소한 물건에서 시작해서 인류의 역사와 인류에 대한 통찰이 끝없이 이어진다.

귀퉁이마다 기둥이 있고, 그 위에 천장처럼 덮개가 있는 침대를 그냥 부잣집 여자의 플렉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설레는 오브제>를 읽다가 이 물건의 이름이 사주 침대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인데 사주 침대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과 역사를 읽게 되는 호사도 누리게 되었다(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이재경 작가는 책 모서리를 접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책에 표시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마땅히 <설레는 오브제>에 그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감동하고 공감을 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열심히 핸드폰 사진에 담을 뿐이다.

설레는 오브제 - 사물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궁리가 있다

이재경 (지은이), 갈매나무(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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