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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의 후 15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 차별과 혐오선동을 이용하거나 방치해 온 정치는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국회 앞 평등텐트촌 농성과 미류(인권운동사랑방), 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두 인권활동가의 단식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차별금지법을 당론으로 채택하지 않고, 여러 핑계를 앞세워 평등을 미루고 있다.

차별금지법 있는 봄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세력의 폭언을 제일 앞에서 맞아야만 하는 성소수자들이 더불어민주당의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기 위해 4월 21일부터 5월 3일까지 매일 한 명씩 공개적으로 편지를 적어 보낸다.[기자말]
남웅
 남웅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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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온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님, 동대문구갑 안규백 의원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동대문구 휘경동에 15년째 살고 있는 남웅입니다. 보통은 남성 동성애자라고 소개하지만 그냥 퀴어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의원님들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적잖이 고민했습니다. 모름지기 편지는 말을 전하기 어려울 때 마음을 담아 쓰는 글이잖아요. 차별금지법 제정 편지를 쓰겠다고 의원님들을 찾지 않았다면 제가 굳이 부를 일도 없었을 거예요. 어느 누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누구인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누구이고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누구인지 일일이 관심을 갖고 이름을 외우겠습니까.

편지를 쓰는 지금의 감정이 그리 좋지는 않은데,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차별금지법도 중요한 이유겠고요. 한편으론 이 감정의 정체를 생각하다가 어떤 상황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15년 전부터 사귀겠다고 약속하더니 몇 번을 변덕부리면서 줄창 밀당만 하는 썸남에게 화내면서도 잘 좀 해보자고 완곡하게 결의를 요구하는 상황이랄까... 가공할 비약인지라 쓰면서도 민망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손끝에 거침이 없어지더라고요.

노무현 정부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몇 차례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찬반 논란만 지속되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2013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지요)의 행보는 최악이었죠. 아실 거예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보수 교회세력의 집단협박과 압력을 이유로 두 차례나 철회한 사실을요. 덕분에 혐오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혐오 세력들은 '차별을 금지하는 건 독재'라는 해괴한 논리가 여론이 되고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죠. 철회 이후 지역 인권조례들이 줄줄이 폐기되거나 개악되는 상황은 정말로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귀 정권과 정당이 혐오의 정치세력화에 이바지한 셈이죠.

정치인은 공인인 만큼 말이 중요하다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의원님들의 말을 기다렸습니다. 박광온 법제사법위원장님, 박홍근 원내대표님,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님,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님, 하다못해 제가 사는 동네의 안규백 의원님 응답까지 기다렸어요. 하지만 의원님들은 어떤 말을 했습니까. 차별금지법에 대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셨으니 기억하실 거예요.

몇 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1) 차별금지법 제정 시기상조다, 2) 차별금지법은 합의가 필요하다, 3) 차별금지법은 필요한 사안이다. 문장이 바뀌기까지 많은 심사숙고가 있었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동안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는 인권‧사회운동단체 활동가들은 죽어라 뛰었습니다. 각지에서 사람을 만나고 틈만 나면 기자회견과 집회를 하고, 국회와 정부의 문을 두드리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설득하고 어르고 달랬습니다.

오체투지를 하고 부산과 서울을 도보로 종단하고 이제는 국회 앞에서 단식을 합니다. 몸으로만 싸웠을까요? 기사를 쓰고 연구를 하고 토론회를 했습니다. 국제사회도 한국에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하고 여론을 모았습니다.

손과 입이 닳도록 쓰고 말해도 이야기는 바닥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여느 때보다 위계와 불평등의 고리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체감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환경이 결국 기득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부당한 차별은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으며, 지금의 차별을 바꿔내는 행동이 결국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실천임을 몸소 배웁니다. 적어도 무엇이 차별인지를 분간할 수 있게 된 변화의 공을 굳이 의원님들과 지금의 정부에게 돌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차별의 감수성을 세공하고 경험을 모아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임을 강조하면 국회에 계신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평등의 의지를 다잡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진했죠. 정치인의 책임을 묻고 요구하면 줄곧 이런 답을 돌려받았습니다.

"인권‧시민사회 운동에서 좀 더 힘을 내주세요."

합의가 필요하다는 유체이탈 같은 화법은 오히려 투명하게 무책임하기라도 했어요. 아니, 운동을 맡겨놓으셨습니까. 힘을 쓰고 합의든 설득이든 이끌어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인권단체와 시민사회 성원들에게 '노오력'을 하라고 주문하다니요. 매번 들어도 곱게 들리지 않습니다.
 
2022. 4. 23. 차별금지법 제정 쟁취 집중문화제
 2022. 4. 23. 차별금지법 제정 쟁취 집중문화제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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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되어서 어느 한쪽의 편만 들어주면 곧장 협박과 공격이 쏟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들의 고충이 많다는 것을 저희도 지근거리에서 익히 봐왔고요. 하지만 정치가 무조건 경제적이고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수의 뜻과 시장의 질서를 따르는 것만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실 분들 아닙니까. 인권과 평등의 가치 아래 성원들이 제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다스리는 것이 정치의 기본적인 가치라는 것도 모르지 않을 거고요.

우리가 많은 것을 요구하나요? 그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고 말합니다. 사회에 취약한 이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하자고 요구합니다. 언제까지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미루고 그 책임을 시민사회에 돌릴 건가요? 취약하고 아픈 고리를 지지하고 보완하여 성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기본 아닌가요? 이런 결정을 하라고 투표를 하고 여러분을 뽑은 것입니다만, 의원님들은 도리어 우리에게 힘을 내서 요구하고 여론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더군요.

그래도 이제야 의원님들은 공감의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아요. 과거 대선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동성애 반대하나"라고 묻자, "저는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 내 동성애)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문재인 대통령까지도 이제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적기라고 생각하니 다행입니다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공감을 표현하며 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공감만을 바라지 않아요.

행동하십시오. 동성애와 낙태를, 이슬람과 난민을, 홈리스와 장애인 권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항의가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 지금은 여러분이 합의가 어렵다고 호소하면서 운동단체에게 힘써달라고 요구할 때가 아닙니다. 부디 차별금지법 제정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시작임을, 시민들이 타인에 대해 낯설어하고 거부감을 가질지라도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삶들을 배워나가면서 서로의 권리를 지지해야 함을 설득해주세요. 그것이 지금 당장 의원여러분들이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혹여라도 노파심에 좀 더 분명하게 말씀 올립니다.
이제 국회의, 더불어민주당의 시간입니다.

지난 4월 28일, 더불어민주당이 차별금지법 공청회를 열겠다고 밝혔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입법을 위한 첫 발걸음을 뗀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야 응답을 보이는 것이 기쁘지만 안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시금 합의를 위한 합의의 항목이 되어 미뤄지는 명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국회가 응답하고 의지를 보일 때입니다.

의원님들이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들이 급하고 불안해 보일지 모릅니다. 당연할 수밖에요. 이미 비상시국이 열렸습니다. 새롭게 당도한 보수 정권이 어떻게 불평등의 지옥문을 열어낼지 알 수 없어요. 그 와중에 민주당은 검찰개혁에만 역량을 집중하고 있고요. 사회 구성원들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제도조차 없습니다.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은 채 세금도둑으로 몰리고 문란한 질병전파자라는 모욕을 뒤집어쓴 채 언제라도 공격받고 제 터전을 박탈당할 수 있습니다. 차별에 대한 감수성과 인권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검찰개혁은 반쪽도 건질 수 없음을 부디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차별금지법은 최소한 인권의 가치를 지키고 성원 하나하나가 개발 논리와 도덕적 기준에 의해 차별받는 부당한 일상을 막기 위한 마지노선입니다. 그리고 망가진 정치의 가치를 다시 세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회를 살아가는 성원뿐 아니라 의원님들이 올바른 정치를 펼쳐내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미션입니다. 다시 한 번 바라건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십시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의 시작을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시작합시다. 평등의 역사를 열어보자고요.

이만 줄입니다. 공감이니 필요니 하는 사탕발림은 이제 물렸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2022. 5. 1.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남웅 드림 
 
2018 차별금지법 제정촉구 평등행진
 2018 차별금지법 제정촉구 평등행진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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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혹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표를 깎아먹지 않을까 하는 가당치도 않을 계산을 하는 건 아니죠? 차별금지법을 제정 안 해도 안 뽑을 사람은 안 뽑습니다. 그러니 그만 망설이고 제발 좀 제정하세요.

태그:#차별금지법, #평등법
댓글2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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