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 블라썸"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스프링 블라썸"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1_추억의 책갈피를 영화화하기까지
 
한 소녀가 있었다. 격동의 15살,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소녀는 성인 남성과 첫사랑에 빠졌었다. 소녀는 그 잊을 수 없던 기억을 되살려 짧은 시나리오 대본을 써본다. 점점 살이 붙어 50쪽 분량까지 왔다. 내친 김에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19살이 된 소녀는 장편제작에 돌입한다. 1년 후 소녀가 각본과 연출, 주연까지 도맡은 데뷔작은 칸영화제 공식초청작이 된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수상도 한다. 스타탄생의 순간이다. 이 모든 게 2000년생 신예감독의 위업이다. 바로 그 작품이 이번에 소개하려는 <스프링 블라썸>이 되겠다.
 
영화의 줄거리는 처음 감독이 구상했던 원안에서 별다른 큰 변화 없이 보강된 내용일 것이다. 마치 비밀일기장을 두근두근 결단 끝에 공개하듯 자전적 이야기이기에 감독은 20살 나이에 16살의 자신을 연기하는 배역을 직접 맡았다. 분명 다른 배우에게 맡기길 원치 않았을 테다. 감독 본인의 체험담을 확고한 자신의 영화화 비전에 의거해 펼치는 본 작품은 흔히 '파격'이란 명목 하에 어린 소녀의 성적 일탈을 관음증으로 전시하는 부류와는 멀찌감치 차별화를 꾀한다. 그렇다면 넘쳐나는 청소년 성장영화 중에서 어떤 차별지점을 이 영화는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을까.
 
2_16살 소녀의 권태로운 일상에 찾아온 떨림의 시간
 
"스프링 블라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프링 블라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16살 수잔은 하루하루가 따분하다. 또래 아이들과는 관심사도 사고방식도 그다지 잘 맞지 않는다. 타인을 배제하진 않지만 억지로 끌려 다닐 생각도 없다.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아직 발군의 내공을 뽐내기엔 경험이 일천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등교를 위해 지나다니던 광장 한 구석 연극 극장에서 공연하는 30대 중반의 배우 라파엘이 수잔의 눈에 띈다. 동갑내기 남자애들과는 분명 다른 분위기의 그에게 수잔은 끌리기 시작한다. 소녀의 첫사랑 순간이 눈부시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빛나는 동시에 깨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으로 다가온다. 이 처음 느끼는 기묘한 열망에 당황한 수잔은 (실제 자신이 가족에게 조언을 청했을 것처럼) 부모님에게 때론 솔직히, 종종 은유적으로 도움을 청해가며 격렬한 감정의 파고를 헤쳐 나간다.
 
소녀 수잔과 30대 연극배우 라파엘이 서로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은 둘 다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권태를 느낀다는 점이다. 각자의 일상에서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대는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둘 사이의 정신적 교감은 깊어만 간다. 하지만 빤한 러브라인이나 단계를 밟는 스킨십이 이 작품에서 설 자리는 없다. 분명 이성적 호감이 일정부분 녹아들어 있지만 둘의 관계는 공통의 숙제를 공유하는 비밀친구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독특한 관계성 덕분에 통상적으로 이때쯤 이런 장면이 나오겠구나 하고 관음증 기대에 휩싸였을 누군가를 부끄럽게 만드는 인상적인 미장센이 수차례 분기점으로 작동한다.
 
감독이 평소 깊게 매료당한다는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공연 한 토막을 목격하는 것처럼 해당 장면들은 감정의 교환이 깊어가는 둘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물론, 서로간의 끌림을 간결한 춤과 무용 동작으로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심지어 성적 터치가 거의 없음에도 관능적으로 종종 느껴지기까지 한다. 온전히 새로운 것을 선보여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무리수를 두는 대신, 자신이 보고 좋아했던 요소들을 제대로 따와서 조합하는 것 또한 20살 신예 감독에게 흔히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부분일 게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일인다역을 소화한 수잔 랭동 감독의 만듦 솜씨는 결코 평이하지 않다.
 
3_평범하지 않은 내력에 기반을 둔 감독의 진면목
 
"스프링 블라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프링 블라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이쯤에서 감독의 집안내력 호구조사를 들어가 보자. 원래 이런 건 안 좋아하지만 수잔 랭동의 경우 부연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영화 속 수잔의 인생선배이자 조언자로서 부모들은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런 극중 부모들의 실제 모델인 동시에 약관의 나이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결실을 선보인 신성의 창작환경에도 실제 감독의 부모들이 상당한 기여도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어머니는 세자르상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 수상경력의 배우 상드린 키베를랭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칸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배우이자 2022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게 된 벵상 랭동이다(!!) 이 배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감독은 다행히도 배우 자녀들이 흔히 겪는 방치나 이혼/별거로 인한 성장환경 문제를 안는 대신, 풍부한 영화적 유산과 업계 전문가 조언 찬스를 출발점부터 확보한 셈이다.
 
그런 영화공부하기 무척이나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수잔 랭동은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를 즐겨 보며 자랐다. 특히 이번 영화에는 자신의 경험과 자기 세대가 아닌 고전명작들을 자유롭게 접해온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과 클로드 밀러의 <귀여운 반항아>에서 십대 소녀의 호기심과 방황을 온전히 추출해 자기 작품에 투여하는 데에 성공한다.
 
특히 <귀여운 반항아>는 어릴 적 수잔 랭동에게 배우의 꿈을 발현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 또한 수잔의 캐릭터에 <귀여운 반항아> 속 주인공의 존재감을 입혔음을 자랑스레 밝히고 있을 정도다. 역시 <귀여운 반항아>로 데뷔한 프랑스 국민배우 샤를로뜨 갱스부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의 출발은 적지 않은 유사점이 느껴진다. 명배우이자 셀럽인 부모에게서 재능과 용모를 물려받았고, 둘 다 데뷔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다, '프렌치 시크' 패션의 아이콘으로 모델 활동도 병행하는 지점에서 기시감이 크다. (수잔 랭동은 현재 샤넬의 뮤즈이기도 하다) 아마 수잔이 커리어를 쌓아갈수록 둘이 같이 언급되는 빈도는 더 늘어나지 않을까.
 
4_사랑이란 이름의 소용돌이에서 슬기롭게 탈출하기
 
"스프링 블라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프링 블라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수잔에게 16살의 봄은 어딘가 다른 느낌이다. 소녀에게 난생처음 찾아온 열정과 강박의 시간은 그만큼 강렬한 체험일 수밖에는 없을 테다. 또래 아이들에게서 얻을 수 없던 세계와 접속하는 비밀통로처럼 첫사랑 라파엘과의 만남은 계속된다. 라파엘 역시 반복되는 공연 레퍼토리에 정체되어 있던 일상을 침범하는 수잔에게 빠져든다. 처음엔 수잔이 십대의 맹목적 돌격을 선보이지만 라파엘은 그런 수잔을 얕보지도, 음심을 품고 가스라이팅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 만남을 통해 각자에게 결여된 것을 채우고 변화의 기운을 확인할 뿐이다. 수잔은 부모자식 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관계로 둘 사이를 정의한다. 허락하는 것과 거부하는 게 명확하다. 라파엘 역시 그런 수잔을 존중한다. 그들의 관계가 그저 불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둘의 교감은 빨간색으로 이어진다. 수잔이 즐겨 마시는 석류 레모네이드의 붉은 빛깔, 수잔은 음료를 마시다 빨대 속 남은 방울을 하얀 탁자 보에 물들인다. 빨간 머리띠를 곧잘 하기도 한다. 다양한 암시가 가능한 컬러 조합이다. 그런데 라파엘이 공연하는 극장 내부나 공연장 세트도 빨간색 위주로 이뤄져 있다. 중반에 세트 담당자가 수잔에게 지나가는 여흥처럼 들려주는 무대 세트 색상에 얽힌 세부적인 조건들 또한 연관 작용으로 역할을 소화해낸다.
 
분명 이 작품은 소녀의 첫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열광적 기운을 동결 건조하듯 압축해 놓았지만 첫사랑이라는 게 본래 달콤 쌉싸름하게 마련인 것처럼 둘의 시간은 통과의례의 경유로 성격을 명확히 굳힌다. 수잔은 영화 속에서 프랑스의 전방위 작가 보리스 비앙의 책을 즐겨 읽는다. 도덕적 판단이나 문제 해결보다는 상황적 행동주의로 분류되는 비앙의 작품세계 경향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수잔의 심리를 은유하는 코드로 봐도 무방할 테다.
 
영화 속에서 둘의 감정 분기점은 종종 다소 급작스럽거나 돌출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툭 끊어지는 것만 같은 순간들조차 실제 현실의 관계들에서 자주 엿볼 수 있는 우발상황의 재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드는 프렌치 음악의 마력과 언뜻언뜻 뮤지컬처럼 느껴지는 현대무용 기반 춤의 향연이 영화 미장센을 보강하기 위해 든든한 원군으로 출격하고 있다.
 
<스프링 블라썸>은 교훈적 성장담으로 규정되긴 애매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인 인생 첫 번째 경험을 격렬하게 부딪히며 경유한 감독 자신의 기록임은 명백하다. 기승전결 형식주의의 속박 대신 지극히 선명한 색채를 띤 감정 선의 조율로 승부하는 영화다. 본 작품은 굳이 장황하게 텍스트로 나열하기보다 극장에서 영화 자체를 즐거이 누리기를 권하는 태도가 훨씬 타당할 테다. 이제 막 위대한 출발을 알린 미래의 감독이 선보이는 <귀여운 반항아> 한 세대 후 신 버전이자 모두가 기다려왔던 다음번 '앙팡 테리블'의 등장이다.
 
<작품 정보>

스프링 블라썸 Spring Blossom, Seize printemps
2020|프랑스|드라마
2022.05.04. 개봉|77분|12세 관람가
감독 수잔 랭동
주연 수잔 랭동(수잔 역), 아르노 발로이스(라파엘 역)
수입 및 배급 영화사 진진
 
2020 5회 마카오국제영화제 감독상
2021 21회 바르셀로나국제영화제 비평가상
2021 35회 마르델플라타국제영화제 SIGNIS 특별 언급상
 
2020 73회 칸영화제 공식 초청
2020 4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020 68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초청
2020 42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초청
2020 56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초청
2020 25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2021 9회 마리끌레르영화제 초청
스프링 블라썸 수잔 랭동 아르노 발로이스 보리스 비앙 샤를로뜨 갱스부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