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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9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2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 당선인 뒤에 기념탑을 친일파 김경승이 만들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9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2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 당선인 뒤에 기념탑을 친일파 김경승이 만들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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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시인 김수영이 4.19혁명 두 달 뒤인 1960년 6월에 쓴 시 <푸른 하늘에> 중 일부다. 지난해 4.19혁명 61주년을 맞아 국립4.19묘지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배 후 자신의 SNS에 올려 크게 회자됐다.

이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19일 이 자리에는 윤석열 당선인이 섰다. 윤 당선인은 "자유와 정의를 지키고자 거룩한 희생을 바치신 4.19혁명 유공자들의 영전에 머리 숙여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명복을 빈다"며 "우리의 헌법 가치에 고스란히 반영된 4.19정신은 국민의 생활과 정부 운영의 전반에 담겨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서 "목숨으로 지켜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국민의 삶과 일상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소중하게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문 대통령에 이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열사들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유에는 피 냄새가 섞였다"

1945년 어렵게 광복을 이뤄냈지만 해방정국은 한마디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과 북은 1948년 각각 단독정부를 세웠고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반도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만 골몰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나날이 커졌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1년 전부터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선거당일 민주당 마산지부는 이승만 정권의 불법적인 행태에 선거무효 선언했다. 이후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무차별적인 진압을 선언했다.   경찰의 총검 앞에 시위가 다소 가라앉는 듯했지만 1960년 4월 11일 행방불명됐던 마산용마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1960년 4월 18일 정치깡패가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에서 연좌시위 중이었던 고려대생 3000여 명을 습격했다. 그 결과 현장에서 학생 한상철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1960년 4월 25일, 제자들의 죽음이 이어지자 대학교수들도 나섰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의 사태수습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결국 1948년 단독정부를 세운 이래 12년 장기집권을 유지한 이승만 대통령이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김주열, 진영숙, 전한승 무덤 가운데 세워진 친일파 기념탑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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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으로 민주정권을 세웠지만 민주주의의 열망은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이후 군사독재정권은 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26년 동안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쿠데타 다음달인 1961년 6월에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를 설립해 국립4.19민주묘지를 조성하고 '사월학생혁명기념탑'도 세운다. 4.19혁명 시민희생자들 묘역 가운데 우뚝 선 높이 21m의 화강석으로 만든 탑 아래 6명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서 있는 '화신상'이 그것이다. 4.19혁명 기념식마다 국가 정상이 참배하는 기념물로 19일 윤석열 당선인 역시 이 기념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문제는 이 기념탑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의 오랜 회원인 그는 1942년 조선미술박람회에서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총독상을 수상했다. 김경승은 매일신보에 수상소감을 남겼는데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노력했다. 대동아전쟁하에 조각계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했다"라고 밝혔다. 그의 친일행위는 1930년대 일본 유학 후 꾸준하게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다.

그러나 김경승은 해방 후 여느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반성 없이 권력에 기대 승승장구한다. 서울시 문화위원회 및 국전 창설위원 등을 거쳐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을 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69년 3·1문화상 예술본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을 비롯해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에 위치한 안창호 선생 동상, 서울 종묘광장 이상재 선생 동상,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세종대왕상, 서울 양화대교 정몽주 동상, 경남 통영 남망산 정상에 위치한 이순신 동상 등이 모두 김경승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제작한 것이다.
 
진영숙 열사 묘.
 진영숙 열사 묘.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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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지 말아야할 사실은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탑 앞에 잠든 이들의 면면이다. 4.19혁명을 촉발시킨 마산상고 김주열을 비롯해 수송초등학교 6학년이던 전한승, 한성여중 2학년으로 시위에 참석해 미아리고개를 넘다 총살을 당해 죽은 진영숙도 잠들었다. 특히 진영숙은 1960년 4월 19일 당일 시위에 나가기 전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만나지 못해 남긴 메모가 유언이 됐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저는 부정선거 규탄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친구,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릴 각오가 돼 있습니다. 어머니 저를 책하지 말고 건강하게 계세요."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55분 참모들과 함께 4.19민주묘지에서 4.19영령들께 참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참배에 앞서 SNS에 "4.19혁명 62주년이다. '강산이 다시 깃을 펴는 듯했다'는 감격의 말처럼, 독재에 억눌렸던 나라를 활짝 펼쳤던 국민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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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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