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영화가 개봉해 흥행하면 그 영화의 촬영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 관광명소로 떠오르곤 한다. 실제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라라랜드>가 개봉했을 땐 시애틀과 LA의 관광지들에 전 관광객들이 대거 몰려 세계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한국영화 중에서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자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이 운영하던 군산시에 위치한 초원사진관 세트장이 2012년 복원돼 현재까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 배경이 됐던 곳이 언제나 그 지역에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대형 물류허브와 소머리국밥이 맛있기로 유명한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은 지난 2018년 동명의 공포스릴러 영화가 개봉해 26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했다. 하지만 흉가와 정신병원이 있는 음침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면서 지역 주민들이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결국 곤지암 정신병원은 2018년 5월에 철거됐다.

영화 속에서 실존하는 지역명을 과감하게 사용해 관객들의 오해를 사는 대표적인 감독은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완벽주의 연출가로 유명한 나홍진 감독이다. 나홍진 감독은 2016년 3번째 장편영화 <곡성>을 만들며 전남 곡성을 졸지에 '뭣이 중헌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동네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2008년에는 장편 데뷔작 <추격자>를 통해 홍익대학교 인근지역인 마포구 망원동 일대를 순식간에 치안이 불안한 위험한 동네로 만들었다.
 
 <추격자>는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었음에도 2009년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 받았다.

<추격자>는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었음에도 2009년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 받았다. ⓒ (주)쇼박스

 
모든 영화가 칸 영화제 초청 받은 유일한 감독

봉준호 감독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박찬욱 감독은 철학과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했다. 대학을 다니지 않고 곧바로 현장에 뛰어든 류승완 감독은 오늘날 흥행감각과 연출력을 겸비한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군림하고 있다. 충무로의 젊은 천재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나홍진 감독 역시 대학시절엔 공예를 전공한 후 광고회사에서 일 하다가 한예종에 들어가면서 조금 늦게 영화공부를 시작했다.

2003년 단편영화 < 5Minutes >를 연출한 나홍진 감독은 2005년 단편영화 <완벽한 도미요리>를 통해 미쟝센 단편영화제 절대악몽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 받으며 본격적으로 재능을 인정 받았다. 2007년 단편영화 <한>으로 부천국제 판타스틱영화제에서 단편부문 심사위원상을 받은 나홍진 감독은 2008년 드디어 세상을 놀라게 한 충격적인 장편 데뷔작 <추격자>를 선보였다. 

당시만 해도 확실한 스타급 배우라고 할 수 없었던 김윤석과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범죄 스릴러 <추격자>는 흥행을 하기에 불리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조연을 가리지 않은 배우들의 호연과 나홍진 감독의 신인답지 않은 감각적인 연출이 더해진 <추격자>는 등급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전국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크게 흥행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데뷔작을 통해 일찌감치 '흥행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나홍진 감독은 2010년 두 번째 연출작 <황해>를 선보였다. 하지만 <황해>는 관객들이 가장 많은 연말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했음에도 전국 220만 관객으로 기대만큼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추격자>를 능가하는 잔인한 묘사와 156분에 달하는 긴 런닝타임, 그리고 영화의 어두운 분위기가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을 공략하기엔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나홍진 감독은 2016년 6년의 준비 끝에 선보인 신작 <곡성>을 통해 '뭣이 중헌디' 열풍을 일으키며 전국 680만 관객을 동원, 다시 한 번 뛰어난 흥행성적과 평단의 극찬을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황해> 편집을 한 달 만에 끝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곡성> 편집에 약 11개월의 시간을 들인 나홍진 감독은 작년 7월에 개봉한 태국의 미스터리 스릴러 <랑종>에서는 제작자와 각본가로 참여했다.

독종 전직 경찰과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추격전
 
 김윤석은 <추격자>를 통해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시상식을 비롯해 무려 7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김윤석은 <추격자>를 통해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시상식을 비롯해 무려 7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 (주)쇼박스

 
<추격자>에서 망원동은 아주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나온다. 지영민(하정우 분)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소가 바로 망원동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화 속에서는 여러 배우들에 의해 수 차례 '망원동'이 언급되는데 <추격자>만 보면 망원동이 대단히 범죄율이 높은 '무법동네'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추격자>는 전직형사였던 보도방(여성도우미의 일거리를 소개하는 업소) 사장 엄중호(김윤석 분)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추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황해>나 <곡성> 등 나홍진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직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관객들이 몰입하기 한층 수월하다. 만약 나홍진 감독이나 배우들이 더 많이 알려진 상태에서 개봉을 했다면 <추격자>는 더 많은 관객을 동원했을 확률이 높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들은 지적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고 냉철한 성격으로 경찰의 포위망을 손쉽게 탈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추격자>의 지영민은 살인마라고 보기 힘든 평범한 외모에 앞 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 놓으며 심리분석관(이종구 분)의 노련한 유도심문에 쉽게 자신의 성적 콤플렉스를 드러내며 흥분한다. 심지어 체력도 별로 좋지 못해 젊은 나이에도 중년인 엄중호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한다.

<추격자>에서 관객들을 충격과 공포로 빠지게 만든 장면은 역시 개미슈퍼 장면이었다. 개미슈퍼 사장은 담배를 사러 온 지영민에게 "여기 도망친 여자가 숨어 있으니 경찰이 올 때까지 지키고 있으라"며 나가려는 지영민을 붙잡았고 심지어 지영민의 손에 흉기까지 들려줬다. 개미슈퍼 사장을 연기했던 이재희 배우의 말에 따르면 슈퍼 사장은 지영민에게 호감이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지영민이 범인이라는 의심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타짜>의 아귀로 주목을 받은 김윤석은 2007년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 출연한 후 <추격자>를 통해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단숨에 빅3(최민식, 송강호, 설경구)를 위협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연기했던 하정우는 <추격자> 개봉 후 관객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2009년 <국가대표>로 84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충무로의 젊은 흥행보증수표로 떠올랐다.

탈출 후 경찰서 대신 슈퍼 찾아간 고생 전문배우
 
 '고생전문배우' 서영희는 <추격자>에서도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돼 온갖 고초를 겪는다.

'고생전문배우' 서영희는 <추격자>에서도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돼 온갖 고초를 겪는다. ⓒ (주)쇼박스

 
서영희는 <궁녀>와 <선덕여왕>,<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마파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등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고생스런 역할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서영희는 <추격자>에서도 딸을 가진 매춘부 미진을 연기해 지영민에게 납치당하면서 온갖 고생을 한다. 미진은 힘들게 밧줄을 끊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다.

배우 박효주는 <추격자>에서 범죄자에게 전혀 주눅들지 않는 당찬 기수대 형사 오은실 역을 맡았다. 오은실 형사는 영화 중반 지영민이 머리 스타일과 향수냄새를 가지고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던질 때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지만 <추격자>의 삭제장면을 보면 지영민이 개미슈퍼에 들어간 것을 봤음에도 겁에 질려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박효주는 2012년 드라마 <추적자>에서도 백홍석(손현주 분)의 조력자 조남숙 형사를 연기했다.

엄중호의 폭력과 경찰의 심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찰을 혼란에 빠트리는 지영민은 딱 한 번 심리분석관과의 면담 때 이성을 잃고 심리분석관을 죽이려 한다. 지영민이 성불구라는 사실과 살해동기를 유추해낸 베테랑 심리분석관을 연기한 이종구 배우는 성우 출신으로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판정시비로 국민적 질타를 받던 나희도(김태리 분)를 격려하는 국밥집 손님으로 출연했다.

<추격자>에는 훗날 김윤석과 하정우 못지 않은 유명배우가 또 한 명 등장한다. 바로 미진의 어른스러운 딸 은지를 연기한 김유정이었다. 은지는 아빠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을 한다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엄중호를 보고 '쓰레기'라고 일침을 날린다('쓰레기'는 엄마의 휴대폰에 저장된 엄중호의 이름이다). 영화에서 주로 성인배우의 아역 연기를 하던 김유정은 <추격자>를 계기로 단독캐릭터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추격자 나홍진 감독 김윤석 하정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