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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 한 칸은 엄마 책 자리다. 여든인 나의 엄마는 한글은 알지만 글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의 책은 놀이책들이다. 미로 찾기, 다른 그림 찾기, 숫자 퀴즈, 색칠하기, 동물놀이, 스티커 놀이 등. 글씨가 커야 하고 그림이 있어야 한다.

또 퀴즈가 너무 어려우면 엄마가 재미를 못 느낀다. 난이도는 4~5세 수준이 적당하다는 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내가 얻어낸 결과다. 아동도서는 나이별로 난이도 구별이 거의 표준화돼 있는 듯싶은데, 노인의 지적 수준은 개인 차이가 커서 나이별로 그룹화할 수 없지 않나.

엄마에게 맞는 난이도의 놀이거리를 내가 직접 찾아야 했다. 서점의 아동 코너에서 한참을 서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엄마랑 같이 가서 책을 고를 때도 있는데 그때는 직원의 눈치가 자녀 또는 손녀 책을 사주러 왔나보다 하는 것 같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 고객들과 늙은 엄마가 아동 코너에서 함께 책을 고르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나이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을 보란 듯이 확인하고 실천하는 현장이 바로 여기구나 싶다.

모녀의 특별한 카페 데이트 
 
엄마는 미로 찾기 왕이다.
 엄마는 미로 찾기 왕이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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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좋아하는 코코아를 주문해놓고 카페에서 함께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엄마는 엄마 책, 나는 내 책. 그렇게 각자 보다가 어느 순간 나는, 엄마와 이야기하는 추억을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책 한 장 더 읽는 게 뭐가 중요할까. 그때부터 우리는 엄마 책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 다음 문제 읽어봐봐."
"달리기대회. 맨 앞과 맨 뒤에서 뛰어오는 동물을 찾아 동그라미 하세요."
"엄마, 잘 읽었어. 그림에서 1등하고 꼴찌가 누군지 찾는 거네."


이 문제는 너무 쉬웠다. 쉽든 어렵든 모든 책이 정답만 맞히고 다음 페이지로 후딱 넘어가기엔 시간이 아까운 면이 있다. 응용하기에 따라 이야기와 놀이를 더 확장할 수가 있다. 물론 그건 나의 몫이다.

"엄마, 정답 찾아서 동그라미를 하고 옆에다가 이름도 써주자."
"얘네 짐승들 이름 쓰라고? 알았어. 쓰지 뭐."
"엄마! 엄마? 잠깐만... 원승희? 원숭이가 나야? 지금 원숭이한테 내 이름을 쓴 거야?"
"왜? 틀렸니? 맞는데..."
"내가 엄마 때문에 웃겨죽겠어~ 하하하"


오 마이 갓~! 원숭이한테 내 이름(승희)을 쓰다니...! 워낙에 책을 평생 멀리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원숭이에다 딸 이름으로 합성어를 만들어버린단 말인가. 나의 폭소와 그냥 따라 웃는 엄마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카페 손님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날의 엄마 웃음소리를 내 대뇌피질의 장기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카페에서 엄마와 퀴즈 책보기의 행복
 카페에서 엄마와 퀴즈 책보기의 행복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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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시하 농사꾼 집에 시집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여자는 아침드라마처럼 다정하게 <늑대를 잡으러 간 빨간 모자>를 읽어주며 아이를 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에 쥔 것은 엄마처럼 꼬부라진 호미가 아니라 여성잡지나 백 선생 요리책일지도...

단계가 높아지면서 나는 엄마를 그림 퍼즐의 세계로 인도했다. 손가락 운동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한다. 아빠가 마실 나가면 친구 없는 엄마로서는 혼자서 갖고 놀기에 퍼즐이 딱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평면 퍼즐부터 시작을 했었다.

"엥? 너는 엄마를 뭘로 보고... 참나, 이걸 하라고?"

보자마자 엄마는 어이없어했다. 내가 꺼낸 그림은 빨간 사과 하나에 6피스였다. 아, 내가 엄마를 너무 과소 평가했구나. "엄마, 이건 내가 너무했네. 하하하" 바로 다음 날 100피스로 점프해서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제 엄마는 500피스도 뚝딱이다. 그럴수록 아빠의 잔소리는 늘어만 갔다.

"내 그거 아궁이 불쏘시개로 언젠간 느버려야지, 당최."
"아궁이에 왜 아빠?"
"네 엄마 저거 마루에 늘어놓는 거 뵈기 싫어서... 원."
"아빠~ 그르지 말고 아빠도 엄마랑 같이 맞추고 그러셔."


아빠는 엄마의 놀이가 영 못마땅하다. 입 안 모래처럼 껄끄러운 아빠의 핀잔에도 엄마는 당당히 평면 퍼즐을 졸업했고 나는 입체 퍼즐로 승진을 시켜드렸다. 머리 쓰기도 좋고 시각적으로도 입체 퍼즐을 백 배는 더 흥미로워하셨다. 엄마는 이제 설렘으로 택배를 기다린다.

온전한 '엄마의 것'이 더 늘어날 수 있길
 
엄마의 거실은 더 이상 올려놓을 데가 없을 정도로 자리란 자리는 다 퍼즐이 전시되어있다.
▲ 엄마의 퍼즐 엄마의 거실은 더 이상 올려놓을 데가 없을 정도로 자리란 자리는 다 퍼즐이 전시되어있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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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거실은 더 이상 올려놓을 데가 없을 정도로 자리란 자리는 다 퍼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도 부활 대성당'을 비롯한 각종 세계 건축물, 지구본, 자동차들, 동물, 로봇... 더 이상 사 보낼 게 없다. 더구나 총천연색 칼라 아동 도서뿐만 아니라 이 퍼즐도 제법 가격이 만만치 않다.

놀러온 손주들이 만져서 퍼즐이 부서지면 엄마는 벌써 입이 나오고 못마땅한 표정을 못 감춘다. 달라고 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엄마의 행동은 더 난감하다. 안방으로 옮겨 방문을 잠그는 게 아닌가. 몇 날 며칠을 끼우고 맞추고 다시 세워가며 완성한 엄마의 꽃 같은 표정을 봤다면... 손주한테도 주기 싫은 게 맞다고 본다.

가족을 위한 것 말고는 엄마가 온전히 자신의 것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비록 종이 쪼가리일지라도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것을 지키는 엄마였으면 한다.

"아이고, 할머니가 돼가꼬... 그래 저런 걸로 애한테 삐지고 참나. 그거 줘뻐리지. 내 저거 언젠가는 불쏘시개로 태와뿌러야지, 원."

아버지의 불쏘시게는 다행히 차고 넘쳐서 엄마의 작품은 아직 건재하다. 요즘은 엄마의 스마트폰에 게임 어플을 설치해드리고 있다.

"엄마 어서 와! 화투 말고 게임은 처음이지?"

엄마는 또 하나의 신세계에 빠져계신다. 덩달아 나는 또 조만간 화면이 큰 태블릿을 사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퍼즐, #원숭이, #미로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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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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