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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 지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비대면 강연은 나에게 넘기 어려운 험난한 산이다. 줌(ZOOM)으로 하는 강연이 시작되기 30분이 되면서부터 딸아이의 대학합격발표를 기다리는 만큼의 긴장을 하게 된다. 화장실을 연신 들락거리고 물을 금붕어처럼 들이킨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최현미 기자가 쓴 독서 에세이 <사소한 기쁨>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초긴장 상태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지내기보다는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300분처럼 느끼지는 30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포의 30분이 마치 3초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사소한 기쁨>은 독자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독서에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흡입장치가 들어 있다. 기자 특유의 간결하고 울림이 있는 문체, 사소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일상의 즐거움, 지성미가 넘치는 세상사에 관한 통찰, 책과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선, 책과 영화의 등장인물이 마치 내 친구나 식구처럼 느껴지는 친밀감, 그리고 과학적인 지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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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기쁨> 표지 표지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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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기쁨>은 기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책을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모범적인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일상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사안에 따라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때로는 밝게 볼 수 있는 통찰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달'이라는 꼭지를 살펴보자. 기자로서 새벽에 출근하는 일상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주인공 덴고가 하늘에 뜬 달을 보면서 한 생각으로 넘어간다. "일류가 불이며 도구며 언어를 손에 넣기 전부터 달은 변함없이 사람들 편이었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 자신의 달에 대한 소고로 이어진다.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지켜낸 달이 나의 출근길을 밝힌다. 달은 내가 태어났던 날 저녁부터 변함없이 나를 지켜 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달은 저 먼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달은 나도 기억 못 하는 나를 알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상상대로라면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테다.
 
언젠가 시골에 사는 내 친구가 웬 큰 나무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동네 나무를 왜 올렸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멋있잖아" 나무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의아해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사소한 기쁨>을 읽고 나서야 그 친구가 어떤 느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내가 이 벚나무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간 숱한 시간을 꼽아본다. 수십 년 동안 수천 번 이 나무 옆을 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고, 동료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걸었다. 가벼운 산책에, 글이 막힐 땐 머릿속으로 글 앞뒤를 정리하며 걸었다. (중략)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시간 속에 걸었다.

그 친구도 자신의 집 앞에 있는 그 나무와 수많은 추억을 남겼고 그 나무는 마치 달처럼 그 친구의 모든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무와 추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무에 대한 애정을 이토록 진솔하고 공감을 주는 글이라니. 또 이런 글은 어떤가?
 
그렇다면 이 쓸데없는 수다야말로 인간을 지구상의 다른 생명과 따로 구분 짓는 가장 인간다운 일일지 모른다. 실제로 수다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일단 맘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관심과 취향이 비슷하고 주고받는 말의 리듬이 맞아야 한다. 주거니 받거니 쿵하면 짝하는 파트너십을 발휘해야 한다. 유머 코드가 같아서 별것 아닌 농담에도 같이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수다에 관한 이토록 재미나고 놀라운 통찰이라니. 최현미 기자는 '동화는 어린이가 독자라는 이유로 그 시대가 믿는 윤리와 도덕 가치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성인 소설보다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어린이를 위한다는 동화가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사소한 기쁨>이라는 동화를 쓰면 어쩌냔 말이다. 그것도 그저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동화를.

<사소한 기쁨>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이 귀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과 어울려 낫질을 하면서 느낀 '행복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따라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 갔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소한 기쁨 - 산책과 커피와 책 한 권의 행복

최현미 (지은이), 현암사(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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