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조립식 가족>의 한 장면.

tvN <조립식 가족>의 한 장면. ⓒ tvN

 
대안 가족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서인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관찰해' 본다는 tvN 프로그램 <조립식 가족>이 방영 중이다. 흥미롭기도 하고, 의구심이 드는 지점도 있다. '조립'이란 본디, 정교하게 단단히 맞춰져야 내구성이 있을 텐데 말이다.
 
왜 동거지?
 
임라라-손민수 커플은 공인 동거 커플이다. 공개적으로 동거 중인데, 이 상태가 이들의 유튜브 채널의 수익 창출 아이템이기도 하다. 쉬쉬하는 동거는 구세대의 방식이라고 코웃음이라도 치듯, 동거를 온 세상에 공표하고 이를 콘텐츠화 한다. 일면 신선하지만, 이렇게 공개 동거를 할 수 있는 커플이 과연 얼마나 될지, 그리고 이러한 동거 형태는 제도적 결혼과 무엇이 다른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성 불평등한 한국 사회에서 공개된 동거는 여성에게 여전히 불리하다.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에서 유진(유라 분)은 연애를 지나 결혼에 이르는 동안, 과거 동거했던 사실을 숨기려 전전긍긍한다. 분명히 동거는 삶의 한 형태지만, 여성에게 적용될 때, 이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혼이 성생활이 전부가 아니듯, 동거 또한 그러하지만, 유독 여성에겐 '성생활이 문란한 여자'라는 혐오적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임손 커플처럼 동거를 공개적으로 활용해 삶을 영위하기란, 한국의 불평등한 젠더 체계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공개 동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동거가 과연 결혼이라는 형식과 어떤 차별점을 지니고 지향되는 것인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양가 부모가 임손의 집에서 마주쳐 상견례 하고 사돈으로 예의를 차리는 장면을 보면, 이들의 동거가 문서화되지 않았을 뿐 결혼과 다르지 않은 가족 관계를 보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혼제도를 거부하고 동거를 택한 한 지인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동거 상태에 서로의 가족을 개입시키지 않는 원칙을 세움으로써, 기존 결혼 시스템의 폐해를 극복한다. 삶의 동반자로서 합의한 동거에 양가의 가족이 끌어들여진다면, 그럼으로써 서로의 가족에 대해 결혼에 준하는 의무를 행해야 한다면, 제도에 편입된 결혼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동거가 반드시 지향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한 명분은 명징하지 않은가. 반면 임손 커플의 경우, 어떤 동기로 결혼 아닌 동거를 지향하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임라라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회고하는 장면에선 더욱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한마디로 가부장의 끝판왕이다. 상주가 딸이면 사위가 상주가 된다. 내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그 마지막 애도를 행하는 주체가 사위가 되는 '망할' 문화다. 애도는 마음이든 형식이든, 상을 입은 사람의 포기할 수 없는 권리다. 나는 엄마의 상을 치르면서, 관을 운구하는 이도, 영정사진을 드는 이도 남자여야 한다고 우기는 장례업체에 분통을 터뜨렸다. 분노로, 영정 사진도 엄마의 시신이 담긴 관도 상주인 내가 맡겠다고 했을 때, 장례업체 직원들이 내게 보낸 냉소와 경멸의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애도의 감각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폭력의 눈빛을 말이다.
 
아들이 없다고 하니 사위부터 찾는 가부장적 장례 문화는 심대하게 문제적이다. 임라라처럼 외동딸인 가정이 어디 한두 집이겠으며, 비혼이 한 추세가 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에서 남자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겠는가. 내 딸만 해도 외동인데, 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손에 들린 내 영정 사진은 상상하기도 싫다.
 
외동딸인 임라라가 갑작스런 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얼마나 막막했을지는 충분히 공감된다. 부모의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준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위 노릇을 대행해 상주 역할을 해 준 손민수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표하는 임라라에게, 부모상을 치른 당사자로서, 나는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주가 되어야 하는 이는 자식인 임라라여야 하기 때문이다. 딸을 상주의 자리에서 밀어낸 장례문화를 문제 삼기보다, 사위 역할로 상주를 대행한 손민수가 고맙다면, 임라라가 결혼이 아닌 동거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동체에 필요한 건, 의리 말고 '분담'
 
 tvN <조립식 가족>의 한 장면.

tvN <조립식 가족>의 한 장면. ⓒ tvN

 
현봉식, 이천은, 김대명의 구성을 보자. 이들은 가족이라기보다 주거지가 필요한 공동조합인 듯하다. 이는 일인 가구의 혹독한 주거난이 고스란히 반영된 구성이다. 이 공동체는 현봉식이 가정 경제를 담당하고, 일정한 벌이가 없는 이천은은 가사를 전담한다. 이 시스템은 이천은이 동거인이고 남자라는 사실 외, 한국 사회에 익숙한 이성애 중심 가정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여기에 합류한 김대명은 가정 경제에도 가사 분담에도 참가하지 않는 특이한 위치를 가지면서도, 이천은에게 음식 타박을 서슴지 않는 가부장적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비혼 지향 생활 공동체를 꾸리고 있는 홍혜은 작가는, 살 만한 공동체는 의리로 다져지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규칙의 준수에 있다고 말한다. 누구 한 사람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불평등을 제거하고, 돌봄과 가사를 균등히 분배한 규칙을 살뜰히 지켜내는 것만이 공동체가 견조하게 유지되는 핵심 기제임을 오랜 공동체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고 한다. 돌봄 분담도 생활 규칙도 없이 성기게 '조립'된 현봉식네 공동체의 미래가 썩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기우일까.
 
피를 나눈 가족만이 안정망이 되는 건 아니다
 
 tvN <조립식 가족>의 한 장면.

tvN <조립식 가족>의 한 장면. ⓒ tvN

 
끝으로 모니카와 립제이의 구성을 보자. 이들은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멋진 여성 댄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한 춤꾼들이다. 이들은 다년간의 동거를 통해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하고 맞춰나가고 있다. 같이 살지만 반드시 독립적 공간을 확보하는 이들의 모습은, 가족이나 공동 주거가 모든 것을 공유하거나 사생활을 침범해도 되는 것을 용인하는 일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생활비를 보조하겠다는 구성원의 제안을 거부하는 현봉식과 달리, 이들은 생활비를 균등하게 감당하고 있다. 돈은 중요하다. 반드시 같은 금액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벌이가 있다면 일정 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공동생활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게 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립제이가 입원과 퇴원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는 '조립식'이라도 가족이라 불러도 무방한 끈끈함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가족을 모든 위험과 위기의 안전판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극심한 위기가 닥칠 때, 가족은 오히려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거나, 한 사람의 희생을 밑절미 삼아 고사된 상태를 겨우겨우 버텨낸다. 이 지점이 바로 가족이 폭력이 되는 참상이다. 가족이 폭력의 근원이 되지 않으려면, 구성원 모두 사려 깊게 돌봄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
 
립제이처럼 질병으로 긴 시간 입원과 재활을 해내야 한다면, 보통은 가족이 그 병수발의 당사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립제이는 원가족에 회귀하지 않는다. 대신 모니카의 이해와 도움 속에서 병원 가까운 곳으로 같이 이사함으로써, 이 위기를 함께 넘어서고 있다. 모니카가 아픈 립제이와 병원에 동행하고, 수술과 회복의 일정을 공유하고 고민하며 립제이의 회복을 돕는 모습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동반자도 삶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가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위기로 해체되는 가족이 아니라, 위기를 공동의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이들의 성숙한 모습에서, 바람직한 대안 가족의 싹이 이미 발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조립식 가족> 가족 대안 가족 생활 공동체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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