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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한반도에서 철도는 처음부터 일제의 침략적 군국주의에 복무하여 부설되었다. 한반도를 'X형'으로 관통한 철도망은 강제 병탄 초기 경성역과 용산역을 중심에 두고 완성된다.

경부선(1904.12)에 이은 경의선(1906.04)은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시급하게 만들어진 노선이다. 본격적인 식민 수탈 철도로서 호남선(1914.01)과 언제 터질지 모를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한 경원선(1914.01)이 동시에 완공된다.

여기에 백두산 산림 자원과 광물 채취 및 수탈을 겸하여 북만주를 침략할 노선으로 함경선(1928.09)이 완공된다. 그럼으로써 한반도 기간(基幹) 철도망이 틀을 잡게 된다.
 
일제 강좀 초기에 제작된 지도에서 이미 붉은 선으로 표시된 'X자 형' 철도 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양 옆 여백에 당시 일제가 중요시 했던 도시 지도가 곁들여져 있다.
▲ 조선교통전도(1910) 일제 강좀 초기에 제작된 지도에서 이미 붉은 선으로 표시된 "X자 형" 철도 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양 옆 여백에 당시 일제가 중요시 했던 도시 지도가 곁들여져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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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발판으로 일제는 만주를 정벌한 만주국(1931) 수립과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중일전쟁(1937)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았다. 전라선(1937), 동해북부선(1937), 평원선(1941), 중앙선(1942), 경전선(1968) 등은 본격적인 자원 수탈을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건설된 철도다. 부수적으로 산업단지나 광산, 주요 도시를 잇는 지선(支線) 철도 노선은 강점 이후 계속해 진행하던 사업이었다.

초대형 철도조차장

일제는 아울러 철도를 이용한 거점 군사도시(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부터 한반도에 적용한 도시계획 조류는 군사시설 위주의 '도시확장'과 확장된 도시에 '국가 통제' 개념이 결합한 기괴한 형태를 띠었다.

이는 파시즘적 군국주의와 천황을 신격화 하는 국수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 다름 아니다. 일제는 대륙침탈 거점 마련이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도시계획을 벗어나 군국주의적 지역·국토계획이 이때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항구도시가 군사시설과 접목된다. 동남해안은 부산과 진해가, 서남해안은 순천과 목포였다. 서해안은 군산과 인천(부평), 진남포가 대상이었고, 동해안은 원산이 거점도시이자 군사도시로 변모한다.

공업화는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블록화였다. 조선과 만주를 일본 본토 공업에 종속적·보완적 체제로 묶어둔다. 북만주와 러시아를 향한 군사 침략 노선은 이른바 '북선(北鮮) 루트' 일환으로 한적하던 나진이 공업과 군사 목적의 신도시로 개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모든 '대륙침략 병참 도시(기지)'를 잇는 교통수단이 바로 철도였다.

이런 침략성을 기성 도시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설이 초대형 철도 조차장(操車場, 철도역의 한 종류로, 화차 및 객차 등 철도차량의 입환과 조성을 위하여 별도로 설치한 장소)이다.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공구를 분할, 순차적으로 착수하였음을 살필 수 있는 도면이다.
▲ 군용철도 경의선 건설공구 약도 경의선을 부설하면서 공구를 분할, 순차적으로 착수하였음을 살필 수 있는 도면이다.
ⓒ 이영천(철도박물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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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 대륙정벌을 시도할 시설로, 대규모 군사기지 및 보급시설과 연계된 형태로 건설이 시작된다. 부산∼(조성된) 용산∼수색∼평양을 이들 초대형 철도 조차장으로 연결할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다. 용산역이 조선 침략 거점 중심역할의 철도 조차장이었다면, 1940년 1월에 착수된 수색 조차장(현 수색 철도기지창)은 대륙침략 전초기지 역할이었다는 게 다른 점이다.

수색 조차장

수색 조차장은 대륙침략 야욕으로 도발한 '중일전쟁(1937.07)'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 및 배후 물류기지 일환이었다. 초대형으로 건설되다가 일제 패망으로 중단되기는 했으나, 용산역과 용산기지 복사판을 수색역과 화전역 인근에 추가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현 수색 철도기지창으로 사용 중인 '수색 조차장'이 건설되었던 곳의 모습이다.
▲ 수색 조차장 흔적 현 수색 철도기지창으로 사용 중인 "수색 조차장"이 건설되었던 곳의 모습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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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 천삼백만 원 예산이 집행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설계도면을 의왕에 위치한 철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수색 조차장의 선로 분기(배선)계획 실시약도이다. 내부 선로 길이만 약 13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왼쪽이 수색역, 오른쪽이 화전역 방향이다. 우측 파란 선으로 표시한 곳이 현재 남아 있는 쌍굴터널 구간이다.
▲ 수색 조차장 배선 실시약도(1945.08.15) 수색 조차장의 선로 분기(배선)계획 실시약도이다. 내부 선로 길이만 약 13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왼쪽이 수색역, 오른쪽이 화전역 방향이다. 우측 파란 선으로 표시한 곳이 현재 남아 있는 쌍굴터널 구간이다.
ⓒ 철도박물관(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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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규모만 보아도 어안이 벙벙하다. 부산, 평양과 더불어 3대 조차장 중 하나로 만들기 시작한 수색 조차장은, 내부 선로 길이만 무려 13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조차장 내에 기관구, 기차고 등 철도운송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계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공대학교 인근 지금도 우리 육군이 부대로 사용 중인 곳에 '일본군 육군창고'가 있었다. 이 창고는 대륙침략에 필요한 폭탄, 탄약, 피복, 식량, 유류 등 각종 물자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아울러 경의선 화전역 너머 우리 육군 30사단이 사용하던 곳은 대규모 군사기지였다. 군사 주둔지와 각종 전쟁물자의 조달·보급이 가능한 체계를 한곳에 집중하여 만들고자 시도한 것이다.

결국 부산∼용산∼수색∼평양∼신의주∼만주로 연결되는 철도 보급체계 통합 관리기능을 이곳 수색 조차장에서 수행하려는 시도였다. 수색 조차장이 한창 건설 중이던 1945년 일제 패망으로 완공되지 못한다. 이곳 시설의 규모와 기능, 배치 상황을 보면 일제는 한반도 식민 지배와 그들이 추구하는 군국주의가 영원할 것이라 여겼는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쌍굴 터널

일제가 패망 직전까지 포기하지 않은 교통수단, 철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경의선 수색역 서북쪽의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말에 건설된 1km 길이의 철도 쌍굴도 그중 하나다.

쌍굴은 직선거리로 10m 간격으로, 약 3m 고저 차를 갖고서 나란히 뚫려 있다. 경의선 철도 수색역 인근에 짓다 만 조차장 흔적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지역주민들은 이곳을 '쌍굴 터널'이라 부른다. 이 터널은 일제가 민간인을 강제 동원해 건설한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1차선 도로로 사용 중인 쌍굴터널 상부선 모습이다.
▲ 쌍굴터널(상부선) 현재 1차선 도로로 사용 중인 쌍굴터널 상부선 모습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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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굴 중 상부선이 일본군 육군창고에서 각종 물자를 실어다 대륙으로 나르는 역할을 하던 선로다. 하부선은 화전역을 경유하도록 계획된 점으로 미루어, 인근 군사기지의 군대를 수송하던 역할로 추정된다. 화전역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선로였으며, 아울러 마포 한강변에 자리하고 있던 '당인리 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는 역할까지 겸했다.
 
일제가 조성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하부선 내부 모습이다.
▲ 쌍굴터널(하부선) 일제가 조성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하부선 내부 모습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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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부선 터널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이용 중이고, 하부선은 폐선 철로가 놓인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가까이에는 지도상에 둥근 선로로 표현되는 드넓은 수색 철도기지창이 있고, 항공대학교 인근 둔덕에는 당시 조차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무연고자 묘지가 있다.

쓸쓸한 무연고자 묘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공동묘지(화전동 663-9번지)에는 일제 전범 기업이 세운 묘비석이 남아 있다. 전범 기업은 '하자마구미(間組)'라는 건설회사다. 이 회사는 일제강점기 내내 한반도에서 철도와 다리 등을 건설하며 부를 축적했다.

일제를 등에 업은 이 회사는 서울 은평구 수색 조차장을 건설하면서 조선인은 물론 만주인과 심지어 러시아인들까지 강제 징용하였다. 하자마구미가 공사장에서 강제 노역하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무연고자 유해를 이곳 공동묘지에 강제 이장한 뒤 비석을 세워 놓았다.
 
전범 기업은 ‘하자마구미(間組)’가 세운 화전공동묘지 내에 있는 무연고자 묘비석이다. 수색 조차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어 착취 당하다 죽은 조선인 노동자들로 추정한다.
▲ 무연고자 묘비석 전범 기업은 ‘하자마구미(間組)’가 세운 화전공동묘지 내에 있는 무연고자 묘비석이다. 수색 조차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어 착취 당하다 죽은 조선인 노동자들로 추정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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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석 재질 비석 앞면엔 '경성조차장제3공구내무연합장지묘(京城操車場弟三工區內無緣合葬之墓)'라 적혀 있다. 뒷면은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수색리(현 은평구 수색동)와 고양군 신도면 덕은리에서 이장하였음을 표기하고 있다. 수색 조차장 두 개 철도 터널(덕은동 20-1번지 일대)과 묘석의 거리는 약 1.2km에 불과하다.

경의선 수색역∼화전역 사이는 소위 '경의선 철도 라인' 관련 유적이 산재한 지역이다. 일제의 대륙진출 야망을 뒷받침했던 기반시설로 경의선 철도가 지난다. 화전동 일본군 군사기지(한국육군 30사단)와 더불어 군수창고, 수색 조차장 및 쌍굴 철도 터널, 화전동 묘비석은 일제가 남긴 아픈 상흔이다.

수색역과 화전역을 통해 대량의 군수물자와 군사, 강제노동 인력이 들고 나던 곳이다. 서울에서 한반도 북쪽을 향하는 철길 길목에서 일제의 강압 통치와 수탈의 핵심 기능을 담당한 곳이었음을 남겨진 흔적은 증언하고 있다.

이 일대가 일제가 남긴 아픈 상흔을 씻고 우리 역사와 민족혼을 회복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또한 하자마구미 무연고 묘비를 통해, 강제노역 희생자와 전범 기업의 조차장 건설 사실관계 규명을 위한 추가 조사 등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쌍굴 터널과 무연고자 묘지는 일제 만행의 상징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만큼, 잘 정비하고 관리하여 일제강점기 역사교육 현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통일을 소원한다. 이는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통일은 곧 연결이면서 변화이고, 모든 것의 회복이다. 경의선은 다행히 통일을 예비하는 철길이다. 그리되면 가장 빨라지고 바쁘게 변화할 철길이 바로 경의선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근 10개월 서울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문화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척 아프고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성원과 질타, 비판은 더 좋은 기사에 대한 값진 자양분이었음도 고백합니다. 이를 발판 삼아 더 좋은 이야기로 찾아 뵐 것을 약속 드리며 연재 '서울 근대건축 톺아보기'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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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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