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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하는 단체가 있다. 여성 농민 공동체인 <언니네 텃밭>이다. 수년 전 토종 씨앗 지키기 운동을 기점으로 인연을 맺었다. 토종 씨앗을 수집하고 경작하는 한 텃밭 강사로부터 들은 얘긴데, 토종 씨앗을 구하기 위해선 어느 마을이든 할머니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할아버지는 허당이고 오직 할머니만이 귀한 토종 씨앗을 갈무리해 보존해 두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라는 호칭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마도 그는 토종 씨앗의 가치를 알고 보존할 정도의 농심(農心)이 있는 연배를 그 정도라 상정한 듯했다.

마치 땅에 붙은 듯이 낮은 몸으로 종일 씨 뿌리고 김매고 경작하는 위대한 여성 농민들. 이 역시 앞선 텃밭 강사의 전언인데, 호미 하나로 그 넓은 밭을 경작하는 농부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밖에 없단다. 크고 무거운 남성 중심의 농기구는 벼농사에 적합할지 모르나, 여러 농작물을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는 밭농사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렇기에 호미는 온갖 작물을 살뜰히 거두어들여 부식으로 만들어 자식들 입에 들어가게 하고, 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야 하는 여성 농민에겐 가장 강력하고 유효한 농기구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고 호미 하나만 있으면 옥답으로 만들어 알토란같은 농작물을 수확해 내는 여성 농민의 힘을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성 농민 공동체인 <언니네 텃밭> 홈페이지 화면 캡처
 여성 농민 공동체인 <언니네 텃밭> 홈페이지 화면 캡처
ⓒ 언니네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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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가사와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그들의 손은 마치 소나무 껍질 같고 허리는 반으로 접혀있다시피 한다. <언니네 텃밭>의 홈페이지를 처음 방문한 날, 여성 농민들의 사진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같이 짧은 뽀글 파마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을린 얼굴에 음각처럼 새겨진 굵은 주름이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피할 도리가 없는 햇빛이 쏟아지는 대지에서 평생을 보낸 그들의 굵은 주름엔 농경지의 흙이 올올이 박혀있는 듯했다.

농사는 돌봄을 최전선에서 깨우치게 하는 대상이다. 허다 못해 화분에 상추라도 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야들야들한 아기 손바닥만 한 작은 이파리 하나를 건지기 위해 어떤 돌봄이 필요한가를. 작물을 자식 보듯 여기며 자신의 수고로 타인을 먹여온 이들이 토종 씨앗을 지키고, 이 씨앗들에서 발아된 농작물로 꾸러미를 보내주고 있었다.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엄마가 보내준 것 같은 농작물 꾸러미

<언니네 텃밭> 여성 농민들이 꾸러미 사업을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수년째 꾸러미 후원을 해오고 있다. 사실 후원이라는 말은 무색하다. 알찬 꾸러미를 받으며 후원이라니, 가당치 않다. 꾸러미를 처음 받던 날의 코가 시큰했던 감흥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꾸러미엔 A4 용지에 쓰인 물품 목록이 담겨 있었는데, 그저 물품의 내용만이 아니라 한 주의 농사 정황이 함께 실려 왔다.

가물거나 장마 또는 냉해로 상한 농작물에 대한 사연과, 이로 인해 꾸러미에 보낸 농작물이 실하지 못하다는 미안한 마음이 담겨있거나, 꾸러미에 담기기로 예정됐던 물품이 오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 이를테면 농민이 갑작스런 사고로 다치는 바람에 농작물 수확 시기를 놓쳤거나, 고군분투했지만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아 양계를 접었다거나 하는 불운한 농부의 이야기가 짧게 실려 올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슬픈 농부의 마음이 되곤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이들의 농산물 꾸러미는 인터넷으로 간편히 주문하고 받는 택배가 될 수 없다.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어찌 보면 수수하기 짝이 없는 농작물 꾸러미지만, 번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농사짓는 엄마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꾸러미가 도착해 물품 박스의 포장을 뜯을 때면, 꼭 농사짓는 엄마가 보낸 보따리를 푸는 기분이 들곤 한다. 박스를 열어 정성스레 갈무리해 보낸 그 주의 농작물을 꺼내 반가이 살펴보고, 급하게 쓴 메모처럼 써내려 간 물품 쪽지를 읽는 일은 내가 한 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꾸러미 박스를 풀며 아마도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나. 한 번은 딸애가 물었다.

"엄마 '언니네'('언니네 텃밭'을 우리 가족은 줄여 '언니네'로 부른다) 오면 되게 좋아하더라. 그렇게 좋아?"

좋고 말고. 누가 내게 이렇게 정성스런 꾸러미를 보내 주겠니. 이젠 이것저것 먹거리 챙겨주던 엄마도 돌아가시고 없는데.

이들이 얼마 전 회원 안내 문자를 보내왔다. 꾸러미 가격 인상에 대한 의견을 매우 조심스레 묻는 설문이 달려 있었다. 부대 경비가 너무 올라 도저히 지금의 가격으로는 농민들이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는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어느 정도의 인상이 적당할지를 소심히 묻고 있었다.

그동안은 월 8만6000원을, 4회 분이니 회당 2만1500원을 꾸러미 가격으로 냈다. 인상폭은 회 당 2500원과 3500원, 두 가지 가운데 선택이었다. 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꾸러미 물품을 받을 때마다 이 가격으로 이런 귀한 농작물을 받아도 되나, 번번이 의문과 미안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상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인상 폭도 높은 항목에 체크하고 나자, 높은 물가로 꾸러미 사업을 접으면 어쩌나 하던 걱정이 조금 옅어졌다. 당연히 올려야 할 사정을 사정하듯 묻고 있어 속이 상했다. 여성 농부님들,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이곳저곳서 당도하는 가격 인상 문의

사실 높은 물가로 인한 구독 가격 인상은 꾸러미 이전 종이 신문부터 발동이 걸린 셈이었다.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보느냐며 터무니없이 한물간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신문은 역시 종이 신문이다. 내 경우 태어났을 때부터 집에 신문이 있었을 텐데, 종일 독서하듯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 덕이었다.

어려서야 신문 내용을 이해할 턱이 없고 그림과 만화에 주력했는데, 오빠가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아버지가 <소년 OO>를 구독시켜 주셨다. 자연스레 신문과 친숙하게 된 습관이 지금까지 종이 신문과 함께 하게 된 사연이다. 종종 유물 취급을 받는 타의적 판단에 함부로 놓이긴 하지만. 종이 신문의 종말이 올 때까지 함께 할 작정이다.

구독하는 H 신문 역시 매우 조심스럽게 구독료 인상을 타진해왔다. 묻는 태도에서 고물가 시대의 팍팍한 삶을 꾸리고 있을 독자에 대한 송구한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고 있었다. 취재를 한 건지조차 의심이 되는 찌라시급 기사를 남발하는 유력 일간지에 비하면, 이 신문 역시, 이 구독료로 이 정도 양질의 기사를 누려도 될까 하는 미안함이 들 때가 많았기에, 흔쾌히 인상에 동의할 수 있었다. 

구독료 가격 인상에 대한 연이은 읍소를 듣다 보니 후원하는 여성 단체도 마음에 걸렸다. 쥐 꼬리만 한 후원에 기대고 있는 시민단체 상황이야 거기서 거기일 정도로 곤궁하기가 여일하겠지만, '여가부 폐지' 운운하며 성 불평등을 자행하는 살벌한 시간을 지나고 있자니 위기감이 배가됐다. 앞선 여성들이 투쟁으로 세운 여성가족부를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없애버리겠다니 아득해진다. 세상은 장기적 변동을 빼고는 진보하지 않는 것일까.

며칠 고심 끝에 여성 단체의 후원비를 증액하기로 하고 증액 신청을 했다. 마음이 좀 편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고민이 자리를 꿰찼다. 이 단체 말고도 후원하는 다른 단체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엮여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이라고 어렵지 않을까. 모두 소수자 인권 옹호 단체라 후원이 박할 터라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장애인 모욕 발언으로 장애인 단체인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후원이 늘었다는 씁쓸한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혐오를 동력 삼아 단체 후원을 끌어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들 이 팍팍한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걱정이다. 벌이가 없는 처지라 후원 단체 모두를 증액하자니, 궁핍한 지갑이 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태그:#<언니네 텃밭>, #여성 농민, #꾸러미, #후원 ,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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