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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잠들어 있는 홍릉은 강화 고려산 자락 깊숙한 곳에 모셔져 있다.
▲ 고종의 홍릉 고려 고종이 잠들어 있는 홍릉은 강화 고려산 자락 깊숙한 곳에 모셔져 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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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고종이란 묘호를 가지고 있는 군주는 2명이다. 고려, 조선시대에 각각 제위를 이어갔던 두 명의 왕은 각각 구한말, 몽골 침략기의 수난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의 고종은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고려시대만큼이나 고려의 고종은 베일에 쌓여 있는 점들이 많다. 그는 아버지(강종)가 최충헌에 의해 옹립되면서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강종이 제위 1년 8개월 만에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 하지만 46년(1213~1259)이란 긴 제위 기간 동안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느라 왕 노릇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했다.      
 
강화로 수도를 이전한 것을 기념으로 조성한 역사테마공원인 고려천도공원이다. 고종은 강화의 승천포로 상륙해 첫 발을 딛었다고 알려져 왔다.
▲ 고려천도공원 강화로 수도를 이전한 것을 기념으로 조성한 역사테마공원인 고려천도공원이다. 고종은 강화의 승천포로 상륙해 첫 발을 딛었다고 알려져 왔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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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최우(최이)로 이어지는 무신집권기 과정에서 그는 유달리 수난을 많이 겪었다. 고종의 제위기간 중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평생에 걸친 섬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치세 말기에 드디어 최씨 정권이 몰락했지만 또 다른 무신 집권자인 김준의 등장으로 실권을 잡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환란이 지속되었던 고종의 시대였지만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일 하나만큼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강화읍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다 보면 선원면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바로 이 일대가 최우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선원사지다.      

당시 선원사는 순천의 송광사와 함께 고려 2대 선찰로 명성을 날렸고, 역대 주지에 진명국사, 원오국사 등 당대의 고승이 임명된 것으로 봐도 남다른 위치를 자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선원사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해 현재 해인사에 소재한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보관했다.

그러나 고려의 흔적이 진하게 풍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선원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근래에 선원사지의 입구에 암자 규모의 새로운 선원사가 건립되었지만 아직까진 너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 탓인지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고려조정이 강화로 천도한 후 지어진 선원사는 순천의 송광사와 더불어 최대 규모를 자랑했었다.
▲ 선원사지의 전경 고려조정이 강화로 천도한 후 지어진 선원사는 순천의 송광사와 더불어 최대 규모를 자랑했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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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절의 바로 뒤편에는 선원사의 옛 터가 고려의 왕궁터처럼 계단식으로 일렬로 늘어서서 예전의 위엄 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예전 선원사의 위상과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려의 귀족들이 당시 백성들의 비참한 삶과 무관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호화롭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터는 산 중턱에서 경사가 끝나는 지점까지 층단으로 구분되었고, 중심 건물터는 남북 길이가 250m, 동서 길이가 170m에 이른다. 하지만 발굴조사에서 선원사지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위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1931년 편찬된 <속수증보강도지>에 의하면 선원면 충렬사 일대가 선원사 일대라 주장하고 있고, 향토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 선원사지는 고려왕실의 가궐(별궁)이란 의견도 존재한다.   
 
조선초에 폐사된 뒤 오랜 세월동안 폐허로 남았던 선원사터의 앞마당에 새롭게 선원사가 재건되었다.
▲ 현재 새롭게 지어진 선원사의 모습 조선초에 폐사된 뒤 오랜 세월동안 폐허로 남았던 선원사터의 앞마당에 새롭게 선원사가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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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어떻게 나든 고종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갔던 왕에겐 대장경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것일까? 하루빨리 개경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왕은 죽어서도 이 강화 땅에 묻혀있다.

그곳은 봄이면 진달래로 산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고려산 남쪽 자락이다. 고려왕릉 중 강화읍과 가까워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지만 이곳의 주인은 국화리 학생 야영장이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가파른 암도를 30분간 오르면서 고종이 묻혀있는 홍릉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유난히 가파른 경사를 힘겹게 오르기를 반복해 저 멀리 병풍석, 난간석 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의 왕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 고종 홍릉이란 안내판만 없었으면 일반 백성의 민묘와 선뜻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그 당시 현실 자체가 왕릉을 건설할 수 있었던 여유 있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안다. 하지만 선원사 같은 대형 사찰을 짓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기록에 따르면 최우의 진양부 같은 저택은 누각이 12채가 있고 연못이 끝도 보이지 않는 규모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왕실의 위엄이 땅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그마한 문인석 4기가 왕릉 한단 아래에 기립해서 죽은 왕을 보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근래에 조성된 듯싶다. 고종은 고려궁지에 살면서 다른 왕들보다 더욱 불교 도량에 집착했다고 전해진다. 보통 도량은 승려가 기도문을 읽는데 몇몇 도량은 고종이 직접 암송할 정도였다. 

국난을 기도로라도 극복하길 바랐을 것이고, 실권이 없는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는 간접적으로 나마 무신정권의 종말에 관여했고, 세자를 몽골에 보내 쿠빌라이를 섬기게 되면서 고려왕조가 원나라에 종속되었지만 그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조선왕조 고종의 릉도 홍릉이라 불린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이 두 임금의 인생 굴곡이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강화에 남아있는 고려의 왕릉과 선원사지를 살펴보며 그 시대를 반추해 보았다.

이번에 고려왕릉을 둘러보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찾기도 힘들뿐더러 특히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녔던 과정 자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지자체나 관련 기관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고 특히 우리 스스로 고려왕릉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권은 4월 중순 출판 예정입니다. 강연, 기고 문의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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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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