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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에 사는 96세 친정엄마가 우리 집에 코로나 피난을 오셨다. 옷 보따리를 메고 간헐적 독거자인 둘째 딸네 집으로 오신 거다. 엄마랑 함께 사는 내 남동생이랑 조카가 확진된 까닭이다. 가족 모임으로 오신 적은 많지만 보름 정도 나랑 단 둘이 지내야 하는 건 처음.

현관 문 여는 방법부터 다르고 집 근처 지리도 낯설다. 혼자 외출이 여의치 않은 현실을 알고 난 뒤 조금 의기소침해지셨다. 이럴 땐 맛난 밥이 최고 아니겠나. 부랴부랴 냉동실에 장기 투숙 중인 죽순을 꺼내 해동한다. 자잘한 조기도 열 마리 찾아낸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시그니처 요리인 죽순조기조림이면 엄마 입맛이 살아날 지도 모른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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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가 반찬이다"는 엄마의 명언이 있었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사는 내 딸도 초대한다. 때마침 토요일이라 느닷없는 모녀 3대 파티 타임! 간 마늘을 듬뿍 넣은 앞다리살 간장 양념구이도 올린다. 게맛살을 찢어 넣은 폭탄계란찜까지, 이만하면 코로나 긴급 편성 오찬으로 손색이 없다.

딸과 나는 맥주, 엄마는 망고주스로 건배한다. 어릴 적 키워 준 외할머니랑 각별한 애착 관계인 내 딸은 나를 빼놓고도 이야기꽃을 피운다. 엄마는 최근 10년, 귀가 잘 안 들려 나와는 필담으로 교신하는 사이. 그런데 웬일인지 손녀의 우렁찬 목소리는 잘 알아듣는다.

화제는 어느덧 내 딸의 텃밭 농사다.지렁이 분변토의 위력부터 대파, 쪽파 옮겨심기까지 온갖 가드닝 노하우를 쏟아낸다.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만으로도 튤립 꽃 피우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자랑질도 서슴지 않는다.

즐거운 점심으로 흥분한 엄마, 잠시 소파에서 눈을 붙인 다음은 산책이다. 300미터 마다 앉아 쉬며, 동네 공원에 다다른다. 데크 깔린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고 나면 산수유와 목련 꽃길이다.

"내년에 피는 벚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몰라." 벚꽃송이에 코를 박으며 혼잣말을 하시는 엄마. 살짝 신파조의 비감한 멘트다. 나는 가차 없이 대응한다. "걱정마세요. 다음 세상, 하늘나라야말로 꽃대궐이거든. 영화에서 많이 봤잖아요." 눈을 흘기며 하하 웃으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는 인사하기 바쁘다. 연둣빛 버드나무에겐 두 손 모아 꾸벅, 동백나무에겐 목례, 그리고 작은 키 회양목 가지는 꼭 붙잡고 악수. 내겐 동네 나무들에게 인사 뿐 아니라 칭찬을 자주 하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는다.

"나무들은 나이 먹을수록 점잖고 멋지잖아. 인간은 나이 들수록 그렇게 되기가 진짜 힘들거든."

과연 그렇다! 나이든 나무의 위엄을 갈수록 실감 중이니까. 옛 전라도 스타일인 엄마의 입맛에 맞춰 저녁엔 청국장과 삭힌 홍어를 차린다. 엄마의 분당집에선 둘 다 금기 아이템이다. 엄마의 아들과 며느리가 청국장이나 삭힌 홍어 냄새에 코를 쥐고 비명을 지르는 까닭이다.

어릴 적부터 먹은 덕분에 홍어 친화적인 나. 묵은 김치랑 돼지목살 수육으로 홍어삼합을 차린다. "미친 놈의 코로나 덕분에 이런 호강을 다 하네." 엄마 말에 함께 푸하핫.

내일은 무슨 메뉴를 할까? 밤마다 구상하며 냉장고 속 채소, 생선이랑 과일을 체크한다. 남편이 사는 대구 집을 오가며 혼자 서울에서 사는 내 처지. 평소엔 냉장고를 털며 군것질로 끼니를 때우는 편이지만, 엄마를 위해 따뜻한 밥을 짓는 오늘이 즐겁다.

일찍 부모를 여읜 친구들, 그 중에서도 엄마를 일찍 보낸 내 친구들은 나를 많이 부러워한다. 그녀들에게서 효도할 기회를 박탈한 친정엄마에 대한 원망까지 섞어서다.

"내가 32평 아파트 하나 장만하고 나면 울 엄마한테 갈비 많이 사드리려고 했거든. 근데 그걸 못 기다려주고 가 버리냐? 무슨 엄마가 그래?"

친정엄마한테 숯불갈비 못 사드려 한이 서린 한 친구, 30년 동안이나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미워한다. 어느덧 백세를 바라보는 울 엄마, 길례씨. 아들딸들에게 효도 놀이할 기회를, 원도 한도 없게 듬뿍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1세기를 풍미하세요.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태그:#코로나, #피난, #모녀3대, #노년, #간헐적독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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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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