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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박래군
ⓒ 출판사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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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0년에 걸쳐 기획한 인권 기행 도서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출간한 박래군을 인터뷰했다(관련기사 : "쓰는 데 10년 걸린 이유? 겁나서"...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고민 http://omn.kr/1nntc). 당시 그는 만 60세가 되면 은퇴하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2022년 현재, 박래군은 이제 만 61세가 되었지만 은퇴는커녕 바쁘기만 하다.

예순이 넘은 인권운동가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는 아직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고, 우리나라 한 해 직접적인 노동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800명, 그 외 산업재해로 인한 질병 등을 모두 포함하면 연간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 앞에서 박래군은 아직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연대해야 할 현장도 차고 넘친다. 어쩌면 그의 행보는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며 자화자찬하는 이 나라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박래군은 최근 인권 기행 시리즈의 두번째 격인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를 출간했다. 그는 인권의 개념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책은 기꺼이 부끄럽고 아픈 역사를 들춰내고, 권력으로부터 희생당한 사람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소환한다. 박래군에게 이 작업은 11년이 지나도 처음처럼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끝을 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2세대 인권운동가의 책임이자,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갈망이기도 하다.

길을 만들고 방법을 찾고... 박래군의 '삶'

이 책에 실린 사건과 장소와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많지 않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끔찍한 일은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를 잊는 것'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2022년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박래군은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장소들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 '길을 내면서' 가야 했다고 밝혔다. 생각해보면 박래군의 삶이 그랬다. 그는 다만 돌아볼 뿐, 돌아가지 않았다. 어찌할 수 없는 산적한 문제들 앞에서 길을 만들었고, 방법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다.

지난 1일 서울 모처에서 박래군을 만났다. 총 2편에 걸쳐 최근 출간한 도서에 관한 내용부터, 윤석열 정부의 노동 정책을 비롯한 사회 현안에 대해 두루 이야기를 나누었다.
   
- 지난 인터뷰에서 만 60세에 은퇴하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는데, 근황은 어떠신가?

"은퇴를 못했고... 여전히 바쁘다. 요즘엔 4.16재단 상임이사를 맡게 되어 안산으로 출퇴근한다. 4.16 세월호참사 8주기가 다가오고 있어 관련 행사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다. 그런 와중에 새 정부가 들어서서 걱정이 많다(웃음). 4.16재단 상임이사 임기가 3년이니까 하는 수 없이 임기 마칠 때까지는 또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얼른 은퇴하고, 소설을 쓰고 싶은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 그렇게 바쁜 와중에 최근 인권기행 두번째 시리즈 격인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를 출간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

"사람들은 너무 빨리 잊는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인 사실인데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인권의 역사란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과정,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한 지난한 싸움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얘기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현장성·장소성을 활용하면 좀 더 재미있으면서도, 쉽게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011년에 현장을 다니면서 처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결국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와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2권의 책을 출간함으로써 11년간의 노력이 일단락된 것 같다."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표지 이미지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표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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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 변한 지점도 있었나?

"분명 그렇다. 어쨌든 11년에 걸친 작업인 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고, 현장을 다니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도 있다. 처음엔 '이 사건'을 잘 이야기하고, '이 장소'를 잘 보여주는 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작업을 위해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하다보니 이 사람들이 '그때 억울했던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아찔할 때가 있었다. 혹자는 그 사람들을 두고, 그저 자기 문제를 풀기 위해서 싸운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역사를 들여다보면,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통해 인권을 진전시켜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관점이 변하면서 책 내용도 좀 더 풍성해지지 않았나 싶다."

-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과정을 위해 인권을 진전시켰다는 점이 멋있는 것 같으면서도 잘 와닿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거의 모든 현장, 모든 사건이 그렇지 않았나 싶은데, 대표적으로 병인박해를 들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 '종교의 자유'를 너무 당연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시작점에 천주교 순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조금 다른 결이지만 동학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우리가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말하지만 원래 동학의 농민들은 한참 동안 반란군 혹은 폭도로 취급받았다. 1894년에 벌어진 이 일이 '동학농민혁명'으로 공인되기까지 무려 110년이 걸렸다. 관계되었던 사람들의 노력, 대를 이어온 연구가 없었다면 동학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반역이나 반란 사건으로 취급받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동학이 재조명되면서 우리나라 인권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 방금 얘기가 나온 동학이 이 책의 시작이다. 그렇게 선정한 이유가 있나?

"인권이란 곧 근대의 산물인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언제 인권이란 개념이 처음 생겼나, 다시 말해 우리나라 역사에서 언제를 근대로 볼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동학이라고 본다. 보통 학교에서는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인권이란 개념이 도입되었다고 가르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동학은 근대 서양의 그 어떤 인권이론이나 개념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뛰어난 측면이 많았다.

서양의 인권론을 들여다보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배제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자유와 평등만을 강조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큰 부작용은 인간이 자연을 계속해서 착취하게 만든 거다. 그래서 지금 이 지구가 어떤 꼴이 되었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야 겨우 인권의 개념을 인간 관계를 넘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로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동학은 어떤가? 모든 자연과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한울님'이 있다고 생각해 인간이 인간을, 인간이 자연을, 아끼고 지키고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려 128년 전에 이미 이런 사상을 만들어냈던 거다."

"교회 인권운동 역사, 어디쯤에서 실종된 걸까 씁쓸"

- 그 외에도 진주 형평사 역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의미 있는 역사 중 하나인 것 같다.

"형평사는 우리나라 인권운동사에 궤적을 남긴,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단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진주'라는 지역이었는데, 당시 백정들이 유난히 몰려 살았던 곳도 아니고 특별히 백정에게 관대한 곳도 아니었음에도 왜 진주에서 백정해방운동을 이끈 형평사가 결성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읽어봐주시면 좋겠다.(웃음)

이번 방문에서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 형평운동이 시작되기 훨씬 전, 진주교회에서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본 최초의 사건이 있었다. 신분제가 공고했던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도 그 교회 한편에는 동석예배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교회 정문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과거 차별에 저항하며 백정과의 차별을 없앴던 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아이러니를 보면서, 교회가 자랑하는 인권운동의 역사는 어디쯤에서 실종된 걸까 싶어 씁쓸해지더라."
 
백정과 동석예배가 있었던 진주교회. 건물 앞 종탑이 보존되어 있다.
 백정과 동석예배가 있었던 진주교회. 건물 앞 종탑이 보존되어 있다.
ⓒ 출판사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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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된 모든 장소를 직접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흔히 민주주의를 일컬어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나. 인권도 그렇다. 피를 먹고 생겨났고, 피를 먹고 자랐다. 그런데 그렇게 흘린 피가 너무 많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인 거창 지역의 박산골을 방문했을 때, 안내해주시던 선생님의 설명 중 한 대목이 잊히지 않는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의 피가 도랑을 타고 박산교 아래 중유천으로 흘러들었는데 물고기들이 얼마나 살이 올랐는지 사람들이 몇 해 동안 이곳의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았다고 해요.' 좁은 골짜기에서 5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총탄에 맞아 죽어갔는데, 물고기들이 그 피와 살을 먹고 살을 찌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골짜기가 더 서늘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적인 장소 중엔 폐허로 남아 있는 곳이 너무 많다. 여성들의 감금 시설이었던 동두천 성병관리소나 울산 형제복지원 건물 같은 곳은 그 동네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막상 가보면 쓰레기 같은 것도 한가득 버려져 있고, 벽에 스프레이로 온갖 낙서가 되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유튜버들의 '야방(야외방송)'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폐가 체험, 공포 체험 한다고 그랬던 거다. 정말 너무 한심하고 화나는 일이다.

이걸 무조건 철없는 유튜버들의 잘못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국가와 지자체가 이런 아픈 역사의 공간을 방치하다 못해 오히려 지워버리고 치워버리려고 한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가는데,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어떤 장소 하나가 제대로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은 큰 차이다. 내 책이나 이 인터뷰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봐서 이런 장소를 제대로 보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양주군 성병관리소.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
 양주군 성병관리소.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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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관리소 내부. 방치된 건물엔 쓰레기만 가득하다.
 성병관리소 내부. 방치된 건물엔 쓰레기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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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전혀 몰랐던 곳이다. 조금 설명해준다면?

"동두천 미군 기지촌은 현장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너무 많이 본 장소이기도 했고, 가장 조심스럽게 쓴 꼭지이기도 하다. 동두천에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미군들의 '위안'과 사기 진작을 위한 방안으로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자연스럽게 미군들을 상대하는 상업이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지옥 같은 구조로 인해 죽어간 여성들이 있다. 국가는 이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칭송하는 척하면서 그야말로 악랄하게 착취했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착취를 '보장'했다. 인신매매하고 성매매하는 걸 권장했고, 미군들에게 폭행당해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맞혔고, 부작용으로 죽어가더라도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미군과 국가 권력에 희생된 여성들이 있었다. 이 나라의 국가 권력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이 여성들을 어떻게 착취했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얘기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 고통받던 당사자가 나섰고, 함께 힘을 모은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이 나라의 어떤 곳은 지옥일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국가와 사회는 들어야 한다.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터뷰②] 이준석은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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