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2 06:01최종 업데이트 22.04.1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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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창설되기 전까지 성인 야구의 중심 무대였던 실업야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초반이다. 역사를 따지자면 8개 팀이 모여 '한성실업야구연맹'을 결성한 해방 직후까지 올라가지만, 전쟁과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해체와 통폐합을 반복한 끝에 5.16 군사정변 직전인 1960년에는 농업은행(농협)과 남선전기 2개 팀이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 실업야구팀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1964년부터는 페넌트 레이스(pennant race)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때부터 비정기적인 단기 대회나 친선 교류 경기 형식으로 운영되던 실업야구가 일상적인 경기 일정을 짜기 시작했고, 선수들도 대회 직전 며칠 간만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몇 년간은 야구장으로 출근하고 야구장에서 퇴근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실업야구의 경기 기록이 공식적으로 관리되고 집계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연도별 경기 기록과 개인 기록이 확인되는 것도 그 시점 이후부터인데, 예컨대 이영민에 이어 해방 이후 한국 야구의 1대와 2대 홈런왕으로 불리는 박현식과 김응용의 통산 홈런 기록이 '100개 이상' 정도로 어림짐작되는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그 이전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그렇다면 1960년대 초에 갑자기 실업야구 창단 붐이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국가대표팀에서 3, 4번 타자를 맡았고 훗날 프로야구에서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한국야구의 대표적 원로 박영길, 김응용은 공통적으로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결정적인 계기로 꼽았다.
 
"그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이 대단한 관심사였어. 반일 감정이 심하던 때니까. 그런데 1963년에 우리가 일본을 이기고 우승하면서 야구 붐이 크게 일어났다고. 그래서 실업팀들이 많이 생겼고, 페넌트 레이스 제도를 도입할 수 있게 된 거야."
- 박영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필자와의 대담에서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예선에서 한 번 이기고 결승에서 또 이겼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우승을 하니까 난리가 났지. 대회 마치고 선수들 다 장충단 공관에 가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났지. 그 영향으로 실업야구가 제대로 시작된 거지."
- 김응용 전 해태 타이거즈 감독, 필자와의 대담에서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한국팀 주장 박현식이 트로피를 받고 있다. 1950년대 홈런왕으로 알려진 박현식의 정확한 홈런 개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실업야구의 기록이 관리되기 시작한 것이 1964년이기 때문이다. 그의 홈런 수는 가족과 후배들에 의해 '100개 이상'으로 추정될 뿐이다. ⓒ 대한뉴스 437호 캡쳐

 
물론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은 대단한 화제였다. 아시아권 대회긴 했지만 단체종목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고, 그것도 그 이전까지 단 한 차례도 이겨보지 못했던 일본을 상대로 2전 2승을 거두며 이룬 성과였다.

선수단은 대회 직후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고, 민정 이양을 선언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공관으로 초대한 선수들에게 동대문의 서울야구장에 국내 최초의 야외 야간 조명 시설을 만들어줄 것을 약속했다. 비인기 종목이었고 지역과 계층이 편중되어있던 야구가 전국적으로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최초의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그 무대 위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던 두 원로 감독의 기억 속에서 그 사건의 파장은 조금 부풀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시즌 전에 4개, 후에 8개의 국영기업과 공공기관들이 야구팀을 창단하면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제패했던 1963년 9월에는 이미 14개의 실업야구팀이 리그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 야구팀 창단 붐

실업야구팀 창단 작업을 주도한 것은 한일은행 전무 김종락이었다. 그는 5.16 군사정변의 설계자인 김종필의 친형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군사정변 주도세력의 일원이기도 했다. 1960년 5월 한일은행 대리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직접 자금을 마련해 군사정변의 '운영자금' 대부분을 조달했고, 아내를 일본의 친정에 보내 두고 자신의 빈집을 정변 모의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 공로로 그는 5.16 직후 건국 2등 훈장을 받고 은행에서도 불과 두 달 만에 대리에서 이사로 승진하면서 금융권 최고의 실력자로 자리 잡았다.

그런 그가 각 은행장들을 만나 실업야구팀 창단을 권유했고, 정부는 창단팀에 1년 치 운영비에 해당하는 60만 원의 지원금을 약속했다.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기관들 중 당장 야구단 하나씩을 꾸릴 만한 재정적 여유를 가진 것이 은행이었으며, 군사정변 직후 국유화된 시중은행들은 정부의 친절한 권유를 물리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주요 은행의 의사결정구조 안에 일제강점기부터 야구부의 전통이 강했던 명문 상업고등학교(선린상고, 부산상고, 대구상고, 경남상고 등)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는 점과 각 지역 명문학교 출신 유력 인사들과의 예금 및 대출 상담이 주요 업무였던 은행들로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거부감이 적었다. 
 

김성근과 최관수 1960년대 초반 실업야구의 팽창은 전업적 야구선수 집단을 형성했다. 야구로 먹고 살 길을 찾아 귀국한 재일동포 김성근(왼쪽)과 고교시절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던 천재 투수 최관수(오른쪽)는 실업팀 기업은행에서 함께 뛰었고, 훗날 각각 프로야구와 고교야구의 전설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 오성자(최관수 감독 부인) 제공

 
말하자면, 실업 스포츠를 확대하고자 한 군사정부의 의도와 국유화된 은행의 상황, 그리고 은행을 둘러싸고 포진해있던 일제 강점기부터 야구의 전통이 강했던 명문학교 출신들의 문화적 친화성이 맞물리면서 은행 실업야구팀 창단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런 야구 진흥의 분위기와 때맞추어 서울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고, 야구에 우호적인 상황 전개를 주목하고 대거 귀국한 재일동포 출신 야구인들의 기여가 맞물리며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상승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야구 통한 은행 취업의 꿈

하지만 더 중요한 파급 효과는 그 이후에 나타났다. 주요 은행들이 일제히 실업야구팀을 창단했다는 것은 야구를 통해 은행에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960년대 은행은 대기업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인기 직장이었다. 해외 원조와 차관 등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시절, 자본의 공급이 정부 통제하의 은행들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가난한 수재들이 몰리던 각 지역 명문 상업고등학교 학생들 대부분의 목표는 은행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964년 은행 고졸 사원 공개 채용의 실질 경쟁률은 20대 1에 달했으며, 각 은행의 1차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이 신문에 게재되었을 정도였다. 선린상고나 덕수상고 같은 최상위권 상업고등학교를 제외하면, 지방의 후발 상업고등학교들에서는 전교 최상위권의 성적을 얻어야만 은행 입사가 가능했다.

그런데 1964년 이후 6개 시중은행에서만 연간 20명 정도를 야구 특기자로 채용했고, 이는 국내 10대 은행 전체 연간 고졸사원 채용 인원 550명의 대략 5% 안팎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은행 취업을 위해 야구에 입문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한 선택이었다.
 
"제가 야구 시작할 때 목표는 하나였죠. 전국대회에서 활약해서 이름을 알리고, 은행에 취업하는 것. 그때는 다들 그랬어요. 은행에 취업하는 게 최고의 진로였으니까. 제가 군산상고로 진학한 것도 그래서였죠."
- 김성한 전 기아 타이거즈 감독, 필자와의 대담에서
  

군산상고의 우승 카퍼레이드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군산상고의 군산 시내 카퍼레이드. 지방의 작은 학교 군산상고는 야구를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동시에 은행에 취업하는 졸업생들을 대거 배출하기 시작했다. ⓒ 오성자(최관수 감독 부인) 제공

 
은행들의 실업야구팀 창단이 발표된 1962년 겨울 동대문상고(현 청원고)가 특별활동반으로 운영되던 연식야구팀을 정식 야구부로 전환했고, 1963년에는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가 3년 전 해체했던 야구부를 재창단했다. 같은 해 전주상고가 야구부를 신설했고, 1968년에는 군산상고에, 1970년에는 경기상고와 광주상고(현 동성고)에 야구부가 생겼으며, 그 뒤로 1970년대에만 목포상고(현 목상고), 천호상고(현 서울동산고), 여수상고, 영동상고(현 영동미래고), 덕수상고, 순천상고 등이 야구부를 만들었다.

1961년 이전까지 창단한 고교야구팀 중 상업계 학교의 비율은 1/4 정도였지만 60, 70년대에 창단하거나 재창단한 고교야구팀 중에서는 절반 이상이 상업계 고등학교였다. 해방 전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던 시절부터 야구부를 보유하고 있던 선린상고, 부산상고(현 개성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경남상고(현 부경고) 등과 함께 전국 주요 상업고등학교들 대부분이 야구부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야구

프로야구의 창설은 한국 야구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자본이 투입되고, 대중의 관심이 모였으며, 경쟁이 치열해졌다. 하지만 그 이전에 '직업으로서의 야구'가 가능해지면서 '전업적으로 야구를 수련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고 그 저변이 확대되었다.

실제로 1950년대까지 야구란 학생 시절 잠시 경험하는 특별활동 정도의 의미를 벗어나기 어려웠고, 그 와중에도 배출된 특출한 열 명 남짓한 수재들이 군부대와 몇몇 기업으로부터 지원받으며 야구전문가로서 명맥을 이어나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야구를 통해 생활자금을 조달하는 선수집단이 형성되었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학생선수들의 훈련의 시간이 늘고 강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무대에서 굵직한 승전보들을 날려오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초반 프로야구를 창설하자마자 순탄하게 안착시킨 것도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내적 역량에 의해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은행과 상업계 고등학교를 축으로 한 실업야구와 고교야구의 연계 구조는 한국야구사의 가장 빛나는 융성기를 예고하는 물밑의 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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