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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나마 익숙함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와 산문은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에 동시에 소개됩니다.[기자말]

- 박은영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합니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느낌
배밀이를 하는 파충류처럼 기어서 기도를 하듯
얼룩을 닦고 모서리 틈으로 스며들어
옆방과 옆방과 옆방을 지나
성자에게 입을 맞춘 가롯 유다의 목을 휘감는,
리을은 차갑습니다

밧줄처럼 동여맨 죄의 형식
여인의 발꿈치를 물고 도망가는 뱀은
흐르는 원죄를 알고 있습니다
배면이 닳도록 흘러가
회칠한 벽에 닿으면 긴 소름의 허물을 벗고
탈피하는 리을,
어제의 내가
옆구리를 지나 찢어진 휘장 안으로 달아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허물고 싶은 글자

리을이 없는 세상은
허무합니다

-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 일요일, 2022년, 70~71쪽


시인은 'ㄹ'에서 걸레질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내가 바닥을 걸레질하기 위해 몸을 숙이고 무릎을 굽힐 때 나는 리을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집안을 청소하기 위한 사람의 몸짓입니다. 또한 시인은 'ㄹ'에서 가롯 유다의 모습도 봤습니다.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리을이 된 그입니다. 하지만 그의 리을은 거짓의 리을이었습니다.

키 작은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할 때 우리는 'ㄹ'에 가깝게 됩니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떨궈 리을이 됩니다. 'ㅣ'가 리을이 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살펴보면 'ㅣ'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ㅣ'라는 모음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ㅣ'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꼿꼿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신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서겠다는 의지를 방증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리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훈민정음에서는 별도로 'ㄹ'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사람이 스스로 낮아지려는 의지'라고 짐작해 봅니다.
 
박은영 시인의 시집
 박은영 시인의 시집
ⓒ 시인의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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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에게는 익숙한 글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춤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낮추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 '무가치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 허물고 싶은 글자'라고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요.

정말로 '나 자신을 낮추는 일'이 무가치한 일입니까. 오만과 겸손 중 오만의 가치가 더 높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껏 배워왔던 진리, 도덕, 상식은 다 거짓이 됩니다. 가치와 무가치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고 마는 것입니다.

화자는 얘기합니다. '리을이 없는 세상은 / 허무합니다'라고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허무'뿐이라면 다행이라고. 진정한 리을이 없는 세상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자를 죽인 '가롯 유다의 리을'만 가득한 곳일 수 있습니다. 마치 '백'을 가진 부자가 '일'을 가진 사람들의 모든 소유를 취해 전부를 갖고자 하는 만행처럼요.

그런데요, 오늘 우리의 사회가 '배신자'인 가롯 유다들에만 축복을 내리고 있다는 생각, 저만의 착각일까요?

시 쓰는 주영헌 드림

박은영 시인은 ...

2018년 <문화일보>와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등이 있습니다. 제주4·3평화문학상, 천강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조영관문학창작기금을 받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시와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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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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