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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서품을 받는 함세웅 신부
 사제 서품을 받는 함세웅 신부
ⓒ 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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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은 1954년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위령의 달'을 맞아 집 근처 성직자 묘지에서 기도하던 중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제가 되리라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천주교와는 운명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를 맞았습니다.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있었는데 어느날 미군의 비29 폭격기 100여 대가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라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북한 인민군이 설치한 한강 임시다리와 연료창을 폭파하기 위해) 폭격을 가했습니다.

오전 10~11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 아이들이 놀라서 달아난 곳이 당시 용산신학교 안 성모병원(지금 성심여고 자리) 이었습니다. 분명 집 앞에서 놀았는데 왜 그리로 도망쳤는지…… 그것이 천주교와 친숙해진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주석 1)

1957년 4월(16세) 혜화동에 있는 사제후보 양성 기숙학교인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성당에서 기도하고 사색하며 규칙을 잘 따르는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제가 어릴 때 한국전쟁이 한창이었죠. 중학교 2학년 때 신부님을 따라 공동묘지 미사를 가 복사(服事, 신부를 돕는 신자)를 했는데, "사람은 태어나서 이렇게 죽는구나"를 알게 되자 현세의 허망함이 느껴졌어요. 전쟁의 비참함은 저로 하여금 영원히 변치 않을 가치를 추구하게 만들었어요. 그게 저한테는 사제가 되는 길이었던 것 같아요. (주석 2)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은 일도 그가 사제가 되는 인연의 한 가닥일 듯하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굉장히 편찮으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어요. 아버님의 장례 미사를 봉헌하는게 계기가 되어서 성당을 다니게 됐죠. 그뒤 신학교에 진학하게 됐어요. 진학에 대해 집안에서 반대가 심하지는 않았어요. 어머님께서는 조금 망설이셨던 것 같지만,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셨던 것 같아요. (주석 3)

내성적인 성격이었든지,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사색하고 기도하면서 보냈다.

고등학교 때는 사춘기가 왔는지 주로 사색하고 기도하고 그러면서 열심히 지냈어요. 친구들과 노는 것조차 피하고, 시간만 나면 성당 가서 기도하고 그랬어요. 학교 규칙도 어기지 않고, 가벼이 지내지 말고 진지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요. 아침 5시에 일어나고 저녁 9시 반에 자는 모범적인 생활이었어요. 우리 신학교에는 "규칙에 사는 사람이 하느님께 사는 사람이다."라는 격언이 있는데, 그 격언대로 살았어요. (주석 4)

머리는 대단히 우수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명동성당에서 교리시험을 봤는데 4명이 100점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넷을 상대로 최석호 신부님이 구두시험을 치르면서 교리문답을 물어봤어요. 그때 교리문답이 모두 320개에 달하는데, 제가 몽땅 다 외워서 결국 1등을 한 적도 있어요." (주석 5)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한 함세웅은 1960년 4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에 입학했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혁명이 일어난 시점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보수적이어서 바깥소식에 철저히 단절되었다. 신문은 통상 사흘이 지난 뒤에야 게시판에 붙이는 등 통제가 심하여 학생들은 4.19를 뒤늦게 알았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사퇴하는 날(4월 26일) 낮 12시 기도 시간에 학장 신부가 4.19혁명과 이승만 퇴임 사실을 알리며 희생된 학생들을 '불사조'에 빗대어 함세웅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후 '불사조'는 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다.  

경무대 (청와대) 앞에서 피 흘리며 숨져간 청년학생들은 우리 시대의 불사조입니다. 불사조는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가서 깃털을 부비고, 거기서 불이 붙으면 다 타 죽어요. 한줌의 재가 식고나면 적당한 온도 속에서 하나의 알이 태어납니다. 그것이 새로운 불사조가 되어 동쪽으로 날아갑니다. 바로 자기 몸을 불태우면서 생명을 이어주는 불사조. 이 불사조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고, 바로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실현해주는 학생들을 상징합니다. (주석 6)

함세웅은 4.19세대로서 당시 학교사정 때문이었지만, 4월혁명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늘 부채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승만 독재보다 더 가혹한 박정희ㆍ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빚 같음'에 나섰다고 할까? 그는 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 때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강론ㆍ연설ㆍ기고문을 통해 자주 불사조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대학생 때 학장 신부로부터 들었던 한마디 '불사조'는 그의 '심장에 꽂힌' 한마디가 되었다.  이후 그는 불사조의 정신으로 사제와 민주화의 고된 길을 쉼 없이 걷게 된다.   


주석
1> 이인우, <'사제인생' 40년 함세웅 신부>, <한겨레>, 2011년 2월 7일.
2> 주슬기,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함세웅 고문>, <부대(釜大)신문>, 2013년 5월 27일.
3> 앞과 같음.
4> <이땅에 정의를>, 30쪽.
5> 앞과 같음.
6> 앞의 책, 3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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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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