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페미니스트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페미니즘을 안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다 내 편같이 느껴졌었다고. 별 설명이 없이도 우리는 웃었다. 한때 믿던 이들과 반목하며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깨달은 시간이 있음을 서로 알기 때문이었다.

리부트 이후의 시간을 살면서 반복적으로 묻게 되었던 것이 있다. 한때 우리는 뜻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무얼 바꾸기는커녕, 정작 우리 사이에서 합의를 만든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정말로 서로 만난 적이, 듣고 이해하려 한 적이 있었을까?
 
을들의 당나귀 귀 2 : 고루한 세계를 돌파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을들의 당나귀 귀 2 : 고루한 세계를 돌파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 한국여성노동자회

관련사진보기

 
<을들의 당나귀 귀 2>는 페미니스트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나에게 말을 거는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이 또한 말걸고자 하는, 지금 내 옆에 있기도 하고 이제는 떠나기도 한 이들을 떠올렸다.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 기억을 가지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그런 의문을 매만지며 읽어나가는 동안 책 속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일과 삶을 통해 얻은 "페미니스트 지혜"(p.6)를 이야기했다.

부당한 호칭에서 드러나는 가족 내 위계에 맞서 '가족 호칭 개선 투쟁'을 시작한 배윤민정 작가는 말한다. "저는 무슨 일이든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생각한 사람이 승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갈등을 통해서 내가 또 누구와 연결되고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또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하고 얻는가에 집중한다면 우리가 싸움을 해도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p.231) 그 싸움이 무엇도 바꾸지 못했다는 회의감에 차있던 생각을 전환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성과중심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존재 방식'의 일환으로 운동을 이해하는 관점은 패널인 한국여성노동자회 임윤옥 전 대표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저항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니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여성 노동자들이 있고, 여성들이 있어요. 그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죠. 그게 우리의 힘이에요. 그리고 그 힘이 나를 살게 하죠. 우리가 건져 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살리기도 하는 거예요." (p.264)

각자의 고통에 매몰되어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생각하던 나를 멈추게 한 말도 있었다. <보건교사 안은영>, <비밀은 없다>를 만든 이경미 감독의 말이다. "내 고통으로부터 출발하더라도, 내 고통에 머물면서 그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고통이 누군가의 고통과 닿는 순간을 찾아서 그걸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을 만드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p.131)

싸웠던 시간들은 그저 나를 소진시켰을 뿐이었다고, 운동은 내가 계속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를 살게 하는 저항'으로서의 운동이 가능하다면, '내 고통이 누군가의 고통과 닿는 순간'을 함께 겪을 수 있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22년 3월 5일 열린 3.8 세계 여성의날 기념, 제 37회 한국여성대회 거리행진 중
 2022년 3월 5일 열린 3.8 세계 여성의날 기념, 제 37회 한국여성대회 거리행진 중
ⓒ 한국여성단체연합

관련사진보기

 
책에서 눈을 돌리면 백래시의 풍경이 있다.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분석과 전망에 귀기울이면서 나는 동시에 페미니스트로 계속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5년이 아니라 50년을 보고 가길 바란다"는 리베카 솔닛의 전언은 꼭 사회운동의 전략에 대한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사상이 나의 삶 속에, 내가 맺는 관계 속에 녹아들게 하는 것도 개인에게 평생의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싸움에서 혼자이고 싶지 않다. 다른 이를 혼자 두고 싶지도 않다. 우리가 서로의 말에 의지할 수 있기를, "서로가 구축해놓은 세계를 공유하고 언급하고 인용"(p.9)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을들의 당나귀 귀 2 - 고루한 세계를 돌파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손희정, 장영은, 김혼비, 전고운, 이경미, 김일란, 윤가은, 배윤민정, 은하선, 허윤, 김현미 (지은이), 한국여성노동자회, 손희정 (기획), 후마니타스(202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는 여성노동운동 단체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