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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삼촌> 앞표지
 <순이 삼촌> 앞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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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주도에서도 5.18 같은 일이 있었다고요?"

고교 시절, 제주 4.3을 처음 접했을 때 당시 나의 반응이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랐고, 구 도청 앞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5.18에 관한 이야기는 익숙한 편이었다. 타지에서 겪은 수모를 한스럽게 이야기하는 선생님도 계셨고, 시민들을 향한 군인들의 발포를 직접 목격한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이렇게 5.18에 대해서만 익숙해져 있다가, 여순사건이라든지 4.3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점점 접해갈수록 받은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다룬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 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소년이 온다>, 창비, p85)

겨우 허기를 느낄 뿐인데도 죄책감과 치욕스러움을 느끼는 자, 고문과 학대의 경험으로 후유증을 앓다가 외로이 죽어가는 자, 자식 잃고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는 자들이 소설에 등장한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다룬다. 토벌대의 집단 학살 동안 시쳇더미에 눌려 있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순이 삼촌은 이미 '그때' 죽었다. 사건이 지나고 수십 년이 지났지만, 순이 삼촌은 당시의 영향으로 피해 의식, 결벽증, 환청과 신경 쇠약으로 고생하다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그가 죽은 곳은 다름 아닌, 그가 시쳇더미에 눌려 있었고 자식들을 잃은 그 밭이었다. 살아남았지만, 그를 삶으로부터 끌어당기는 그 죽음의 밭으로 돌아가기를 기어코 선택한 것이다.

이렇듯, 무고한 자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사건들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이라는 보편적인 서사가 있다. 이분들은 분명히 사건 이후에도 그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고 살아가는데, 과연 과거사를 묻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4.3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도, 긴 세월 동안 '폭도들의 섬'이라며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한이 <순이 삼촌>에서 드러난다.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삼만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한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온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삼십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순이 삼촌>, 창비, p85-86)

공비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공비로 오해받을까 봐 도피자가 된 자의 가족들을 전부 멸하는 정도의 일이 비일비재했던 걸 보면, 4.3은 이념의 광기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불편함을 이기지 못한 자들은 서북청년단과 군경의 행태를 변호하기도 할 것이다.

"그땐 산에 올라간 사람은 무조건 폭도로 봐시니까. 하이간 굴속에 있는 사람은 영 행색이 말이 아니라서. 굶언 피골이 상접헌디다가 한겨울에 젖은 미녕옷 한벌로 몸을 가리고 떨고 있는디, 동상 걸려 발구락 모지라진 사람도 더러 있었쥬. 소위 비무장공비란 것이 이 모냥으로 동굴 속에서 비참한 꼴로 발견되니까 냉중엔 상부에서도 생각을 달리 쓰게 되어서. 구호물자를 준비한 갱생원 차려놓고 선무공작을 썼쥬. 엘파이브(L-5) 연락기로 한라산 일대에 전단을 뿌련 투항을 권고하난 하루에도 수십명씩 떼 지어 귀순자들이 내려와서라."

"바로 그것입쥬. 선무공작은 왜 진작에 쓰지 못했느냐는 말이우다. 처음부터 선무공작을 했으면 인명피해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아실 거라 마씸. 폭도도 무섭고 군경도 무서워서 산으로 피난 간 양민들을 폭도로 간주해시니......" (<순이 삼촌>, 창비, p84-85)

억울하게 희생될 뻔한 도피자들을 '귀순'시키기도 한 걸 보면, 학살을 한 자들에게도 후유증이 작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그들이 저지른 학살의 '오류'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소설의 화자도 비슷한 말을 한다.

"때마침 6.25가 터져 해병대 모병이 있자 이 귀순자들은 너도나도 입대를 자원했다. 그야말로 빨갱이 누명을 벗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대로 눌러 있다간 언제 개죽음당할지도 모르는 이 지긋지긋한 고향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모 형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3기였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용맹을 떨쳤던 초창기 해병대는 이렇게 이 섬 출신 청년 삼만명을 주축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용맹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따지고 보면 결국 반대급부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빨갱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몇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그들인지라 한번 여봐란듯이 용맹을 떨쳐 누명을 벗어 보이고 싶었으리라.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거기엔 보복적인 감정이 짙게 깔려 있지 않았을까? 이북 사람에게 당한 것을 이북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섬 청년들이 6.25동란 때 보인 전사에 빛나는 그 용맹은 한때 군경 측에서 섬 주민이라면 무조건 좌익시해서 때려잡던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오류를 저릴렀나를 반증하는 것이 된다." (<순이 삼촌>, 창비, p83)

이 부분을 남침을 한 북한 세력에 대한 비호로 읽는 것은 분명한 오독이다. 당시 군경은 남로당 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주도민들까지 좌익 세력으로 몰아 3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다. 이후에도 '붉은 딱지'가 붙여진 제주의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이 딱지를 떼어보기 위해 전쟁에서 '용맹하게 활약'한 것일 수 있다는 현기영 소설가의 추론은 합당해 보인다.

제주의 서사, 광주의 서사는 이렇게 '국가적 대의'를 명분으로 무고한 자들이 학살된 사실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서사가 쌓여 대한민국의 서사를 이루고 있는 만큼, 바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서사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과 유가족들의 한을 풀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언제까지 이야기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묻고 싶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바로 그러한 태도가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기억하지 않고 유사한 일이 반복된다면, 그 책임은 도대체 어떻게 지려하는 것인가.
 
첨부파일
IMG_0665.jpg

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창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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