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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4년 6-7월의 상황이 이어집니다.

서울의 일반 도로는 너비가 고작 10피트 정도로 그냥 맨 땅인데 길 양쪽으로는 하수가 흐르는 도랑이 깊이 나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오물이 뒤섞여 있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배변을 봅니다. 무더운 여름날 산지사방의 도랑에서 풍기는 악취는 대단했습니다. 비가 오면 도로가 너무  질척거려 도통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서울의 민가를 처음 보았을 때 유목민 무리의 야양지(encampment)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낮게 주저앉은 엉성궂은 가옥은 마치 짓다 만 것처럼 보였습니다. 진흙과 돌, 나무와 볏집으로 만든 오두막들인데 온통 끄을려 까맣고 낡고 허약해서 언제라도 곧 허물어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건 정착해 살 주거라기 보다는 언제라도 떠날 그런 임시 거처로 보였습니다. 나는 1882년 시베리아 여행에서 골디(Goldi)족과 길약(Gilyak0족의 집들을 본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서울 집들이 그걸 빼다 박은 모습이었지요. 대체적인 형태도 같았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시베리아 사람들은 유목민들로서 한 곳에 정주하지 않습니다. 초라한 집들, 음식, 식사, 개와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이동중인 유목민의 일시적인 캠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상류층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일례로 지난 해 가뭄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그 원인이 일본 공사관에 걸린 일장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흰색 바탕에 붉은 원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자기들의 농작물을 태워 버리는 폭염이라는 것이지요.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였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벼슬아치는 잘 살고, 일을 죽어라 하는 평민들은 죽을 지경으로 못 살았습니다. 대체로 말하자면, 오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관리와 백성. 전자는 모두 부유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았고  후자는 모두 가난하고 누추하고 무력한 모습이었습니다. 일하지 않는 양반은 그 수가 엄청 많았습니다.

도둑이 창궐했습니다. 공사관에 짐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시베리아 트렁크가 부서진 채 열려 있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없어졌더군요. 그 중에서도 리볼버 권총(연발식 권총)이 없어져 버렸답니다.

같은 날 밤 공사관 게스트 하우스에도 강도들이 들어와 많은 가구와 벽에 걸린 장식품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거실에 도둑이 든 일도 있었고 두 명의 강도가 도어벨을 떼어 달아난 일도 있었지요.

7월 초 어느 날 밤 11시에 공사관의  내 숙소를  민영익이 푸트 공사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늘 보는 일입니다만 민영익에게는 하인들이 떼를 지어 따라 붙습니다. 민명익이 탄 말을 끌기도 하고, 가마나 우산, 가죽 백에 든 요강, 그리고 담배 도구나 인장 등속을 나르는 자들이지요. 그날 밤 민영익이 내 숙소에 머무는 동안 민영익의 하인들은 문지방과 유리창문 주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11시 30분에 푸트 공사가 민영익에게 자기 집무실로 가자고 하면서 내게도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나는 집 단속을 대충 해놓고 따라 나섰습니다. 좀 후에 돌아와서 보니 금 시계와 시계 줄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도난 사건이 내가 서울에 온 지 두 달 만에 네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일단 도난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엄청 동정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곳에서 내게는 시계가 필수품입니다. 나의 랑카스터 시계는 다른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었는데 그게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도난당한 권총은 미국 정부의 공용 장비였습니다.

연이은  도난 사건으로 우리는 신경이 날카로와졌고 불안했습니다. 우리 공사관엔 국왕이 보내준 경비병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없는 것만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물건을 감쪽같이 훔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공사관에서 직접 순찰을 돌았습니다. 매일 밤 무장을 하고 한 바퀴 돌았지요.

내가 보기에 당시 조선은 갈림길에 놓여 있었습니다. 근대적 자주 국가로 탈바꿈하느냐, 몰락하느냐. 조선은 바야흐로 구체제에 균열이 생기면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구 사대세력이 철옹성 같았지요.   

과거 수백 년 동안 언제나 중국이 조선의 모델이었고 중국 문화와 가치관이 조선 정부와 백성을 지배했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소수의 진보파는 신문명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중국의 유교를 고수하려는 세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정부에서 무언가 새로은 일을 추진해보려 하면 극히 사소한 일 조차도 굉장히 긴 논쟁이 오갑니다. 결국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말기 일수였지요. 어떤 사람이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기거나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정보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허구헌 날 공리공담만 하다가 볼 일 다 보지요.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바깥 세상에 눈을 뜬 개화파가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나는 그들과 친하게 지냈지요. 특히 서광범을 좋아하고 존경하였습니다. 부모님 앞 편지에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본 모든 한국인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liberal) 인물은 서광범이랍니다.  그는 이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든지 아니면 나라를 위해서 희생되든지 할 것입니다. 저는 그를 아무리 칭송하여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처럼 순수하고 매력적이고 진실된 인물은 여지 껏 결코 만나 본 적이 없었구나 하고 저는 자주 생각한답니다. "
-1884.7. 22일자 편지에서


당시 조선에는 서광범과 같은 진정 진보적인 사람은 손꼽을 정도였고 수구파와 기회주의자들이 철옹성을 쌓고 있었지만 나는 웬지 조선인들에게 믿음을 가졌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즉, 조선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먹이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느리고 신중하지요. 그래서 어떠한 거대한 책략에도 휘말려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
-1884. 7.22일자 편지에서

 
나는 당시 밤낮 없이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조선에 근대적 농장을 만드는 프로젝트였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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