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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기자말]
학기에 두 번, 외국인 학생들의 강의평가가 끝나면 며칠 동안 미적거렸다. 강의평가는 내가 이번 학기 적절하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는 성적표였다. 최대한 최악을 상상하여 보호막을 만든 뒤에야 벌벌 떨며 강의평가 메뉴를 클릭했다.

항상 적절해지고 싶었다. 적절하다는 건 사회적으로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서면 ADHD 증상 때문에 자꾸만 부적절한 내가 튀어나와 아슬아슬했고, 그 줄타기에 실패했을 때 기다리는 건 추락뿐이라고 느꼈다. ADHD 자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정신병이기에 모두가 거는 '정상'의 기대치에서 더욱 자유롭지 못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추락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날도 있었다. 학교 일을 정리하기 전 마지막 학기였나. 평가 글 중 눈에 띈 한 문장이 있었으니, 번역하자면 이랬다.

"그는 정신적 문제가 있다."

이상함과 불편함

이어지는 문장들의 어감으로 치자면 나란 사람은 이해불가한 '상또라이'였다. 글쓴이는 나에게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짐작이 갔다. 그 학기 그 반에서 나는 결정을 여러 번 바꿨다. 내 과제 채점 방식이 그 문화권에서는 생각보다 더 빡빡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두어 번 방식을 수정해서 공지했다.

변명 같지만 다른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힘들기로 악명 높은 반이었고, 당시 나는 정서적으로 심하게 불안정했다. 나를 이른바 '또라이'로 지정한 학생은 내가 내면에 가득한 불안 때문에 학생들 눈치를 보는 걸 간파했고, 그게 너무도 싫었던 거다.

웬걸. 언제나 단 한 줄의 불만사항만 있어도 개선에 골몰하던 나였는데, 그 순간은 이 생각만 들었다. '오호라, 다 보였던 거구나! 나 문제 있는 거.' 그는 정신적 문제가 있다, 그는 정신적 문제가 있다… 이 문장이 박하처럼 청량했다.

어차피 비정상으로 보인다니. 정상으로 보이려 애쓸 필요가 없잖아? 후들거리며 서 있던 줄 아래로 시원하게 뛰어내린 기분. 모든 판단과 행동이 교육적이고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부수어진 쾌감. 불편감을 준 건 미안했지만, 그간 하도 마음이 시달리다 보니 솔직하게 적어준 그 학생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주인공 ‘팻’은 조울증과 분노조절장애로 문제를 일으키고, ‘티파니’는 사별의 슬픔을 타인과의 성적 친밀감으로 해소하다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런데 어째 주변 사람들 상태가 더 불건강한 것도 같다. 스포츠 도박에 중독되어 강박증에 휘둘리는 팻의 아버지,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철저히 감추기만 하는 팻의 친구 ‘로니’. 소문을 듣고 티파니를 이용하려 드는 경찰도 제정신 같진 않다. 영화는 정신적 문제라는 게 특별히 잘못된 소수의 일은 아님을 보여준다.
▲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주인공 ‘팻’은 조울증과 분노조절장애로 문제를 일으키고, ‘티파니’는 사별의 슬픔을 타인과의 성적 친밀감으로 해소하다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런데 어째 주변 사람들 상태가 더 불건강한 것도 같다. 스포츠 도박에 중독되어 강박증에 휘둘리는 팻의 아버지,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철저히 감추기만 하는 팻의 친구 ‘로니’. 소문을 듣고 티파니를 이용하려 드는 경찰도 제정신 같진 않다. 영화는 정신적 문제라는 게 특별히 잘못된 소수의 일은 아님을 보여준다.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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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상점에서 물건값을 결제하고 나갈 때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저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좀 이상하네.' 작은따옴표로 처리한 이유는, 내 머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사람들 입 모양에 맞췄을 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딱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이상해 보이진 않지만, 예상치 못할 때 은근한 이상함을 풍기기도 한다. 대체로 그건 '왠지 지금 이상해 보일 것 같은데... 절대로 이상해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되뇌고 있을 때다. 그럴수록 행동이 과장되거나 어색하거나 얼빠져 보이게 된다.

여기서 '이상함'이란 사실은 '싫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낌새든 자신의 예상 범위에서 벗어난 걸 접할 때 불편해 한다. 실제로는 아무 불편을 끼치지 않았어도, 선을 그음으로써 자신의 정상성과 안전감을 확인하고자 한다.

나도 그런 습관에서 자유롭진 않다. 거기에 학을 뗀 장본인이기에 자신의 아집을 의식하려 애쓸 뿐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정한 정상성 영역이 얼마나 비좁은지, 장애가 있든 없든 '이상하다'를 비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라이로서의 작은 다짐

대학 때 '하얀 장갑'이라 불리던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는 365일 하얀 장갑을 끼고 다녔다. 장갑을 벗지 않는 그는 기인으로만 인식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누가 늘 장갑을 끼고 다닌다면, 감염증을 철저히 예방하려 하는 사람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나는 냄새에 민감해 코로나 전부터 한여름 빼고는 늘 마스크를 썼고(나는 전형적으로 시청촉각 자극에 과민한 ADHD인이다), 해외생활을 하며 가벼운 오염강박이 생겨 알코올 솜을 자주 사용했다. 늘 유난스럽다고 싫어하시던 어머니는 코로나가 터진 후엔 신기해 하신다. "너는 어떻게 알고 그런 습관을 들였냐잉?"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사회 규범에 따라 만들어진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청각장애인과 건청인 모두 수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온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 섬에서는 농인들이 수적으로 소수자이나, 모두가 수어를 알기 때문에 사회·경제·정치적인 면에서는 비주류가 아니다. ADHD가 있는 한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떤 별에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표준일지도 몰라요."

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이 밝혔듯 '정상이란 개념은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한 실체 개념이 아니'며, 특히 ADHD는 스펙트럼 장애(또는 질환)로 보는 의견이 많다. ADHD 경향성이 짙은 비ADHD인도 있고, ADHD 범주에 속하지만 끝에 걸려 있는 사람도 있다.

ADHD가 있는 사람 중 약 10%는 증상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어떤 상태를 병이나 장애로 분류하는 건 정상/비정상을 가르기 위한 게 아님을 기억하자. '일상에 심한 방해를 받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명칭이 필요할 뿐이다.
 
이탈리아 밀라노대학의 한 연구팀이 건강한 성인의 꿈과 조현병 환자의 ‘기괴성 밀도 지수’를 연구한 결과, 꿈은 정신질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건강한 성인은 조현병 환자의 상상보다 기괴한 꿈을 꾼다. 조현병을 가볍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정신병이라는 분류가 생각만큼 나와 동떨어진 세계는 아니라는 의미다.
▲ 꿈은 정신질환과 비슷하다 이탈리아 밀라노대학의 한 연구팀이 건강한 성인의 꿈과 조현병 환자의 ‘기괴성 밀도 지수’를 연구한 결과, 꿈은 정신질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건강한 성인은 조현병 환자의 상상보다 기괴한 꿈을 꾼다. 조현병을 가볍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정신병이라는 분류가 생각만큼 나와 동떨어진 세계는 아니라는 의미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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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 기준에 열려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에 갇혀서 사고할 때 더욱 비상식적으로 행동하기 쉽다는 점이다. 신기한 일이 많다. 정치인들이 '정신질환자'란 단어를 공적 비난에 이용할 수 있는 것,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이동권을 보장받으려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 언론이 상해사건 가해자의 비정상성만을 내세워 가십으로 소비하는 것... 호불호와 옳고 그름은 분명 다른 건데 말이다.

자꾸 잊지만, 우리는 모두 병들거나 늙는다. 그건 모든 이가 공유하는 정상성이다. 어디가 얼마나 불편한가, 얼마나 다른가도 시간을 초월해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누구나 계속해서 변화하는 생의 한 지점에 서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주변을 걱정시키기도 했다. 길에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다가올 때 피해서 걷지 않아서다. 나는 낯선 이가 갑자기 아는 사람처럼 자기 얘길 늘어놓아도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았다. 세상 험한 건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나쁜 사람인지 아픈 사람인지 모를 때는 그가 평생 받아왔을지도 모를 상처를 보태고 싶지 않았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은 외로워 보였다. 걸음이 이상하다는 게 그가 피해야 할 사람이라는 증거 같지도 않았다(이건 내 자기연민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은 겁이 늘어 그렇게는 안 한다. 그래도 나만은 쉽게 비정상의 꼬리표를 달지 말자는 다짐을 자주 한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아한 또라이로 살련다

"자긴 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귀여운 거 같아."
"또라이 같다는 뜻이지?"
"응."


애인과 했던 대화다. 신기하게도 '또라이'라는 말에 애정이 담겨 있으면 듣기가 좋다. 누군가 내게 "의외로 똘끼 있네"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가 친해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동료 선생님이 내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며 "이 쌤은… 또라이야"라고 은밀하게 가르쳐줄 때는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건 꼬리표를 붙이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다. 나를 나답게 봐주고 있고, 남들과 다른 모습도 날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뜻이다. 눈빛과 말투와 우리가 지속해온 관계로 안다. 적절성과 정상성에 대한 불안을 놓도록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나는 요즘 모든 사람이 ADHD 스펙트럼 위에 있다고 상상하는데, 맞고 틀리고를 떠나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다. 예를 들어 카페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마치 영원히 뜯을 것처럼 끊임없이 빨대 비닐포장을 뜯거나, 공용벤치에서 계속 몸을 흔들어 같이 앉아 있는 나를 그네 태울 때면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럴 때, '저 사람도 충동성이 강하거나 경조증 비슷한 게 있나 보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겠지' 상상하면 분노가 싹 사그라든다.

이왕이면 우아한 또라이로 살고 싶다. 소신을 지키고 내 어려움에만 매몰되지 않으면서. 우린 진단명 없이도 적절성의 강박에서 벗어날 자유가 있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사이에 그어놓은 금은 지우고 '상식선'을 챙기는 데 집중하는 일. 다 같이 으쌰쌰하면 좀 쉬워질 것 같은데. 이것도 말이라 쉬운 것이려나.

덧붙이는 글 | * 참고 기사: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 된다"(프레시안, 2009.10.04.)

* 브런치에도 연재합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 다음 화는 '소수자성'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 한 주를 휴재하고 4월 20일 수요일에 게재합니다.


태그:#성인ADHD, #정신장애, #편견, #정상성,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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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단단해지지 않아도 좋다는 단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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