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30 06:23최종 업데이트 22.03.30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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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특별고문으로 임명된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재임 2013~2016)은 한국 근현대사 인식에서 문제점을 드러낸 학자다. 24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윤석열 특별고문 이배용, 친일·독재 미화 역사교과서 국정화 참여'(http://omn.kr/1xz54)를 비롯한 언론보도들에서도 확인되듯이, 역사학자인 그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참여했다.

교육부 산하인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펴낸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백서>는 이배용 전 원장이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으로 활동했음을 보고한다. 백서는 "총 16명의 편찬심의위원 중 교수 위원 7명 전원은 청와대에서 추천한 인사가 초빙을 통해 선정됐다"라면서 그를 거명했다.

그는 심의위원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청와대와 접촉하면서 국정교과서 활동에 참여했다. 백서는 "청와대와 교육부에서 국정화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자들은 청와대 업무 부서에 역사 전공자가 없는데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토나 역사학자 인선에 대한 자문이 가능했던 것은 비공식적 자문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라고 한 뒤 청와대에 자문을 제공한 역사 전문가들의 면면을 관계자들의 진술을 기초로 소개했다.
 
또한 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도 (청와대) 수석이나 그 이상급 인사들과 접촉하고 있었고
 
이 부분은 익명으로 처리돼 있지만, 당시의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이배용이었다. 그가 국정교과서에 깊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교과서는 박정희 정권의 죄악을 합리화하고 친일파에 대한 서술을 축소했다. 또 대한민국의 법통이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있다는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설정했다.


대한민국이 1919년에 출발했다는 말은, 그 시점에 대한민국이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일제 지배를 거부한 1919년의 정신을 기초로 대한민국을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뉴라이트 학자들은 '1910년 8월 29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독립된 정부가 없었다'라는 논리를 대면서 1948년 건국설을 주장한다. 이는 항일운동을 폄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친일을 합리화하는 논리로도 악용될 여지가 있다.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간주하게 되면 친일 부역행위를 반국가행위로 처벌하는 일이 쉬워지고 그 역사를 청산하기도 수월해진다. 1948년 건국설은 이에 대해 걸림돌이 된다.

그런 걸림돌들이 박혀 있는 국정교과서를 관철하는 일에 이배용 전 원장은 깊이 가담했다. 백서에 따르면, 2015년 12월 20일 그는 편찬심의회 부위원장이 됐다. 이처럼 깊이 개입했다는 것은 그의 역사의식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한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12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명, 표현을 바꿔 행정예고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 가장 왼쪽이 이배용 편찬심의회 부위원장. 2015.10.12 ⓒ 이희훈

 
친일 행위 뺀 김활란 평가

그의 역사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친일파 김활란에 관한 논문에서 잘 드러난다. 이화여대 선배이기도 한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을 평가한 '김활란, 여성교육·여성활동에 새 지평을 열다'라는 논문이 그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활동기간(2005~2009) 중인 2008년에 <한국사 시민강좌>에 실린 이 논문을 읽다 보면, '눈에 띄는 것' 한 가지와 '눈에 띄지 않는 것' 한 가지를 접하게 된다.

눈에 띄는 것은 '1948년 건국'이 두드러지게 강조됐다는 점이다. 1945년 해방 이후를 설명하는 부분들에서 "대한민국 건국", "신생국가", "건국 사업", "건국의 동력", "건국의 기초", "건국의 주춧돌"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논문에서 그는 친일파 김활란에 대한 평가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을 빠트렸다. 이것이 '눈에 띄지 않는 것' 한 가지다. 김활란의 여성운동과 정치·외교 활동은 상세히 서술한 반면, 그의 친일 반민족행위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활란은 열심히 친일 활동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 등에 참여해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도왔다. 또 청년들을 대일본제국의 전사로 만들기 위한 조선청년단에도 가담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모순된 행적을 남겼던 것이다.

논문에서 이배용은 "김활란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사회 발전을 중심에 두고 여성의 정치 참여, 사회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여성 활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친일반민족행위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또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발전에 즈음하여 김활란은 시대적·국가적 요청에 부응하여 새로운 여성교육을 이끌어 나갔지만, 그 저변에는 민족교육의 실행과 한국 여성의 인간화라는 소명의식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김활란이 "민족교육의 실행"에 이바지했다고 하면서도 그가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부역한 사실은 거론하지 않았다. 참고해야 할 요인들을 전부 참고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참고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이배용은 김활란의 일제강점기 활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중요한 것을 빠트렸다. "김활란이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그 '힘'을 경험한 것은 1922년 YWCA를 결성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근우회에서도 활동하였다"라고 한 뒤 곧바로 "해방 이후 김활란은 본격적으로"라는 표현을 써가며 해방 이후에 대한 서술로 넘어간다.
  

김활란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 이화학당

 
이 논문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인해 친일청산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 민감해진 시점에 발표됐다. 이런 시기에 친일파에 관한 논문을 내면서도 친일행위를 소개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변명이나 해명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친일행위 부분을 빼고 여성운동만 평가한다 해도 김활란의 친일이 자연스레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여성운동을 통해서도 친일을 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36년 말부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라면서 "황거 요배와 축제일 국기 게양 등과 같은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는 활동에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한국 여성들이 일왕(천황)의 궁전인 황거를 향해 절을 하도록 하는 것이 김활란의 여성운동에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성운동을 통해서도 친일을 했으므로, 김활란의 여성운동과 김활란의 친일을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배용 논문에서는 김활란의 친일이 언급되지 않았다.

4.19와 이화여대

김활란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화여대 역사 속의 부끄러운 부분과도 닿아 있는 인물이다.

이화여대 학생운동은 4·19 이전과 이후의 역사발전에 기여했지만, 4·19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화민주동우회 이화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가 작년 10월에 펴낸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는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들도 참여한 4·19 반독재 시위에서 이화대학은 참여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라며 "개인적으로 3백여 명의 이화인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시위에 참여했던 후일담은 드물지 않으나, 이화의 이름으로 참가하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19세기 후반 이후의 이화여대 학생운동사를 정리한 이 책은 "4월 19일에서 29일까지 이화대학은 휴교 상태였다"라며 "19일의 학생 시위와 25일 교수단 시위에 이화는 없었다"라고 한 뒤 "당시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이 부총장으로 있는 상황이 타 대학과의 고립을 부르는 조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 등을 제시했다.

4·19 당시의 이화여대 부총장은 박마리아, 총장은 김활란이었다. 박마리아의 그늘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김활란 역시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1960년 5월 18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대 앞(에)서 시위'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서울 동구여고 학생 4백여 명이 비 내리는 17일 밤 8시 반부터 '김활란은 돈벌이 교육을 하지 말고 진짜 교육을 시켜달라'고 요구, 김활란씨를 만나기 위하여 이화대학교 정문 앞에서 4시간 기다렸으나, 학교 측에서는 아무도 안 나왔고 자정이 넘어서 군대 트럭이 학생을 실어가서 데모를 해산시켰다.
 
10대 학생들까지 반독재 투쟁에 나선 4·19 때 김활란이 총장으로 있는 이화여대는 침묵을 지켰다. 마땅히 시위에 참가했어야 할 단체가 불참을 했다면, 단체의 대표가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도 김활란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런 점도 이배용 논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배용 한지살리기재단 이사장이 24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제4회 전통한지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종로 포럼' 개회사를 하고 있다. '전통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단'(단장 이배용)은 지난해 4월 추진단 결성 후 경북 안동을 시작으로 경북 문경, 전북 전주에 이어 4번째 포럼을 마련했다. 추진단은 지난해 말 '한지살리기재단'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했다. 2022.3.24 ⓒ 연합뉴스

 
이처럼 이배용 특별고문의 역사의식에는 문제점이 있다. 그의 논문에서는 친일청산에 대한 우리 시대의 간절한 염원이 외면되고 있다. 다른 주제에 관한 것도 아니고 친일파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도 그는 그런 염원을 외면했다.

이배용 전 원장은 친일파를 친일파로 부르지 않았다. 이런 그가 윤석열 당선인의 특별고문으로 기용됐으니 윤석열 정부의 역사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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