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영화운동의 최전선'

신간 '영화운동의 최전선' ⓒ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1990년대 후반부터 급속하게 성장한 한국영화를 말하려면 그 바탕이 됐던 1980년대 영화운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80년에 시작해 2000년까지 20년이란 시간 동안 한국영화가 겪은 변화의 폭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이고, 한국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저질영화가 판치던 한국영화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두각을 나타낼 만큼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이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 바로 영화운동이었다. 최근 영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이런 현실에 기인한다.
 
영화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한상언영화연구소가 펴낸 <영화운동의 최전선>은 그런 흐름에 맞춰 한국영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의 활동을 정리한 기록이다. 2년 정도 짧은 시간 활동했으나 그 시절 영화를 꿈꿨던 지금의 중년 영화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한국영화에 남긴 강렬한 발자국이 영화 역사 전문가인 한상언 박사의 손을 거쳐 복원된 것이다. 
 
전체 676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두툼한 책이 내내 흥미로웠던 것은 그 시대의 활동을 충실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꼼꼼한 정리가 매우 인상적일 만큼 당시의 활동을 보여 주는 풍부한 사진과 자료는 1990년대 전후로 한국영화의 변화를 위해 애썼던 이들의 치열한 활동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영화를 좋아했던 젊은 대학생들이 이후 한국영화의 중심에 오르게 되는 단초를 엿볼 수 있다.
 
학술적으로 위장하려 '연구소'로 이름 지어
 
민족영화연구소는 1990년대 한국영화의 이론가이자 평론가였던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이정하(전 영화평론가)가 중심이 된 영화운동 조직이었다. 영화제작을 위해 별도로 한겨레영화제작소를 만들어 도시 빈민을 담은 16mm 극영화 <하늘아래 방한칸>을 제작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영화운동과 민중운동에서 이들의 활약은 돋보였다.
 
초기 한국영화운동은 서울대 영화서클 얄라셩으로 출발해 서울영화집단으로 이어졌다. 1986년 서울영화집단에 이효인과 이정하가 합류했고, 몇 차례의 분화 과정을 거치면서 두 사람이 중심이 돼 민족영화연구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민주화운동 단체기도 했지만 다소 학술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연구소라 이름 짓게 됐다. 
 
1988년 9월 설립 이후 민족영화연구소는 민족영화에 대한 담론 연구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각종 집회 및 시위들을 비디오나 8mm 영화 카메라로 촬영했다. 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교육용 교재로 만들어 배포했다. 노동현장과 재야 단체 등에서 이들이 만들어낸 영상물은 유용한 선전도구였다.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시기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사회적 현안을 알리며 재야 언론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늘아래 방한칸>제작에 들어가며 고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는 이수정 감독

<하늘아래 방한칸>제작에 들어가며 고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는 이수정 감독 ⓒ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1980년대 후반 민족영화연구소 회원들. 왼쪽부터 박상희, 이효인(경희대 교수), 김준종(부천영화제 사무국장),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1980년대 후반 민족영화연구소 회원들. 왼쪽부터 박상희, 이효인(경희대 교수), 김준종(부천영화제 사무국장),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한국영화의 대표적 정책전문가인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제작자이자 영화제 행정전문가인 김준종(부천영화제 사무국장)이 한국영화에 첫발을 디딘 계기도 민족영화연구소를 통해서였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재춘언니> 이수정 감독, 1990년대 학생운동이 만들어낸 역작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상인 감독 등이 중심에서 활동했다. 민중영화 <하늘아래 방한칸>은 이수정 감독의 첫 연출작이었다.
 
<영화운동 최전선>은 그 시절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연구소의 활동을 되살려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학술 가치와 함께 사료적 가치가 상당할 정도로 자료와 기록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폭넓은 내용을 다양하게 담아 예전 무크지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도 특색이다. 빼곡히 담긴 사진은 화보집이고, 간행물과 수많은 문건은 자료집이며, 대학신문 등에 기고한 글들은 1980년대 후반 영화운동의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학술서 역할을 한다.
 
여기에는 이수정 감독과 이효인 교수의 역할이 컸다. 사실 그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다. 당시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 엉뚱하게 조직사건으로 엮여 괜한 피해를 입은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비판적인 시민들을 감시하던 시절이었기에 흔적을 남기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그 당시 사진들을 고이 간직했던 덕분에 지난 시절의 시간을 되살릴 수 있었다. 이효인 교수가 모아뒀던 각종 회의문건과 여러 대학신문에 기고했던 글 역시도 시간이 흘러 훌륭한 귀중한 사료가 되면서 영화운동의 속살을 드러낼 수 있게 했다.
 
이효인 교수가 당시 주창했던 "민족영화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고, 당시 제시했던 한국영화의 방향성이 현재 어떤 식으로 반영됐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 
 
단편영화·소형영화·작은영화에서 독립영화로
 
 1989년 한겨레영화제작소 창립 기념산행

1989년 한겨레영화제작소 창립 기념산행 ⓒ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영화운동의 최전선>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당시 민족영화연구소의 중심에 섰던 이효인·이정하·이수정에 더해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했던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이 함께한 4인의 좌담이다.
 
3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영화계 최초의 시국사건인 "파랑새 사건"에 관한 회고와 연세대 영화서클 '영화패'와 경희대 '그림자 놀이'가 만들어지던 과정, UIP직배 반대 투쟁과 관련한 충무로 영화계와의 연대 등 당시 활동에 대한 회상에 더해 여러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풀어놨다  

당시 영화과 교수들마저 책으로만 이해하고 가르쳤던 <전함 포템킨>을 일본에서 구해온 비디오로 누군가의 집에서 잔뜩 몰려 보던 풍경이나, 김홍준 감독(현 한국영상자료원장)이 미국 유학 중 전공은 등한시하고 도서관에서 <점프컷>이나 <시네아스트>를 보내오면 중요한 부분을 추려내 번역했다는 변재란의 기억, 그리고 각자 영화운동에 발을 딛게 된 과정 등을 통해 새로운 영화와 변혁운동의 도구로서 영화를 지향했던 이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 활동을 평가하고 당시 기고됐던 글의 방향성을 분석한 연구자들의 해제(解題)는 <영화운동의 최전선>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흐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운동의 최전선>은 지금의 한국영화 성장의 밑거름이 된 과거의 영화운동을 통해 현재를 점검하고 이를 통해 미래 한국영화의 자양분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기록이다.
 
특히 현재 한국영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영화인 대다수가 영화운동 세대이고, 당시 활동에 대한 재정리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운동의 최전선>은 한국독립영화의 뿌리 찾기 과정이기도 하다. 단편영화, 소형영화, 작은영화 등으로 불리던 이름이 독립영화로 불리게 된 것도 바로 이들에 의해서였다.

민족영화연구소 대표였던 이효인 교수는 "작디작은 활동이었고 무슨 평가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단지 운 좋게 기록으로 남기게 되어 정말 치열하게 피 흘린 분들께 송구할 뿐이다"라며 "그분들 곁에서 조금이나마 거들었던 기록이 그분들의 희생에 조그만 곁가지 자긍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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