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세, 전원이 거칠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첫 구절이다. '귀거래'는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에서 산수와 벗하며 자족적인 삶으로 돌아가려는 옛 선현들의 꿈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귀농이나 귀촌 등으로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시민들은 '귀거래'를 가슴속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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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귀래정 정면 모습 고성 이 씨, 낙포 이굉 선생이 1513년 지은 정자 . 안동 낙동강과 반변천 합수 지점에 세웠으나 큰 도로가 나면서 지금의 자리로 물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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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정상동에 있는 '귀래정'은 조선 중종(1513) 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돌아온 낙포 이굉(李汯)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귀래정의 원래 위치는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수하는 지점이었지만 큰 도로가 생기면서 지금 자리로 물러났다.
낙동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강변을 돌다 영가대교 남단으로 올라오면 귀래정이 보인다. 왕복 6차로 바로 옆에 있는 데다 400~500년이 된 은행나무가 정자를 지키고 있다. 귀래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언제 보아도 넓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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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래정 정자 모습 앞면 2칸, 뒷면 4칸 규모의 T자형 건물.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 팔작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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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은 앞면 2칸, 뒷면 4칸 규모의 T자형 건물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마루 주위를 제외한 다른 곳의 기둥은 각이 있고 창문에 쐐기 기둥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안내돼 있다.
이곳에는 이현보·이우·이식·윤훤 등 30여 명의 시를 보존하고 있다. 특히 '귀래정' 현판 글씨는 초서에 뛰어났던 조선 중기 서예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가 쓴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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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래정 현판 조선 중기 초서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가 쓴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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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포 이굉 선생 시판 낙포 이굉 선생이 귀래정을 짓고 "스스로 읊조리다"라는 시를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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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는 '귀래정'을 1985년 8월 5일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했다. 이 귀래정에서 불과 100여 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정자, 반구정 재사(伴鷗亭 齋舍)가 있다. 이 정자는 임청각을 지은 이명 선생의 여섯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1530년 초기에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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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반구정 정자 이 정자는 임청각을 건립한 이명 선생의 여섯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1530년 초기에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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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굉의 아들 어은(漁隱) 이용(李容) 역시 이곳에 돌아와 은거하니 삼세(三世)가 은둔한 곳이 되면서 조선 숙종은 이를 기리어 '고성이씨 삼세유허비'를 건립했다. 그 후 퇴락하여 빈터만 있던 것을 영조 16년(1740)에 중건했지만 1945년에 정자가 소실되어 1946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됐다고 한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반구정 재사'로 표기됐으나 지역민들은 "반구정 정자가 맞다"라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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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반구정과 동.서재 반구정에서 시회(詩會)와 향회(鄕會)를 자주 열면서 숙식 등을 위해 동·서재(東·西齋)를 지었고, 장판각에 주사(廚舍, 주방)까지 만들면서 서원처럼 강학 공간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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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곳 반구정에서 시회(詩會)와 향회(鄕會)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숙식 등을 위해 동·서재(東·西齋)를 지었고, 장판각에 주사(廚舍, 주방)까지 지으면서 서원처럼 강학 공간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58호로 지정돼 있다.
[귀래정]
경북 안동시 정상동 777번지. 영가대교 남단
[반구정]
경북 안동시 정상동 486번지. 귀래정에서 100여m 떨어져 있다. 덧붙이는 글 | '자전거로 떠나는 안동 문화 여행'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