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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우리 공연문화는 '판소리'와 남사당으로 대표되는 '유랑 예인집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 말 청계천 변 중국인 거주지에 경극공연이 활발해지자, 여기서 착안한 예인들이 극 형태의 판소리 분창(分唱)인 '창극'을 탄생시킨다.
 
국립극장 격의 사설극장으로 이인직의 '은세계'를 시작으로 주로 창극을 공연했다. 이인직 등 친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1914년 화재로 소실된다.
▲ 원각사 국립극장 격의 사설극장으로 이인직의 "은세계"를 시작으로 주로 창극을 공연했다. 이인직 등 친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1914년 화재로 소실된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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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관립 협률사(協律社, 1902)라는 연희단체이자 공연장이 생기면서 창극이 활성화하고, 지금의 새문안교회 터에 국립극장 격의 사설극장 원각사(圓覺社, 1908)로 이어진다. 하지만 강제 병합으로 창극단은 유랑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판소리도 말살 정책에 휩쓸려 든다. 유랑극단시대다.

그 빈자리를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이 채운다. 피식민지 초기 잠깐의 전성기를 구가하나, 그 통속성으로 곧바로 외면받는 처지로 전락한다. 이 자리를 '활동사진'이라는 영화가 비집고 들어온다. 연극과 영화를 한 무대에서 교차시켜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연쇄극' 형태가 시초였다.
 
종로 묘동에 1907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이곳에서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연된 날을 기념하여 '영화의 날'을 제정하였다.
▲ 단성사 종로 묘동에 1907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이곳에서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연된 날을 기념하여 "영화의 날"을 제정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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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에서 상연한 <의리적 구토>(1919.10.27)'는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 연쇄극으로 '영화의 날'은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서울에서 처음 상영된 영화는 1903년 각국 명승지를 소개한 영상으로 추정한다. 또한 전차를 운영하던 한미전기회사가 승객을 늘이려는 영업 차원에서, 동대문에 소리패 전용 가설무대 광무대(1898)를 만들어 미국영화를 상영(1907)한 것을 영화관의 시작으로 본다.

극장 건립과 영화

조선인이 주관객이던 영화관은 비교적 초기에 생겨난다. 2층 목조의 단성사(1907)는 전통연희 공연장으로 시작해, 박승필이 인수(1910)한 후 3층 벽돌조로 개조되어 상설 영화관으로 변모한다. 주로 신파극을 공연한 연흥사(1907), 전통 연희극을 공연하던 장안사(1908)가 상설 공연 및 영화관으로 등장하였다가 1910년대 중반 사라진다.
 
일본인이 '경성고등연예관'으로 세워, 우미관으로 개칭(1915)하였다. 주 관객은 조선인이었다. 명동과 충무로의 일본인 상권에 대항하는 조선인의 종로 상권 상징으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 관철동 우미관 일본인이 "경성고등연예관"으로 세워, 우미관으로 개칭(1915)하였다. 주 관객은 조선인이었다. 명동과 충무로의 일본인 상권에 대항하는 조선인의 종로 상권 상징으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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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연예관이 변모한 우미관(1915), 조선극장(1922)이 영화관으로, 전속 연극단까지 갖춘 동양극장(1935)이 대중성과 오락성, 영향력을 두루 발휘하는 연극극장으로 성장한다.

일본인 관객 전용이던 경성좌(1905)·어성좌(1907)·경성고등연예관(1910)·관상장(제일극장, 1910년대)·황금연예관(1912)·낭화관(명동극장, 1917)·중앙관(중앙극장, 1922)·대정관(약초극장, 1930) 등이 순차적으로 문을 열었다.
 
중구 초동에 일본인이 세운 약초극장. 사진 우측 건물에 '약초영화극장개관'이라 쓰인 것으로 보아, 1930년 사진으로 추정된다.
▲ 약초극장 중구 초동에 일본인이 세운 약초극장. 사진 우측 건물에 "약초영화극장개관"이라 쓰인 것으로 보아, 1930년 사진으로 추정된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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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유럽에서 제작된 '무성영화'가 수입되어 이들 극장에서 상영된다. 이때 '변사'가 전성시대를 누린다. 요즘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영화의 시대다.

일제 감시체계는 매체 발달과 그 궤를 같이했다. 신문지법(1907)과 출판법(1909)으로 신문과 잡지, 출판물의 사전검열과 정·폐간을 가능케 한 사례가 있었다. 영화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1922)엔 서구 수입 영화에 치중하여 풍기문란이나 폭력 등에 검열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인 영화제작이 본격화하자 '흥행및흥행장취체규칙(1922)'을, 제작 편수가 많아지자 '활동사진검열규칙(1926)'으로 철저한 사전검열을 시행한다. 변사도 선발시험을 통한 자격제로 통제를 강화한다. 만주 침략 이후엔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1934)'을 통해 일제 시책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상영을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한다.

전쟁이 대륙과 동남아로 확장하자 섬나라 영화계는 '일본영화령(1939)'을 제정, 전시체제로 전환한다. 한반도에선 '조선영화법(1940)'으로 전쟁과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 법으로 9개 사가 참여한 '조선영화제작자협회' 결성을 강제, 영화제작에도 관여한다. 전쟁이 무르익자 기존 10개 영화사를 통폐합하여 '조선영화제작회사(1942)'를 설립, 영화제작을 사실상 국유화시킨다. 이 회사를 통해 전쟁에 협력하는 이른바 합작영화 제작을 강요했다.

제작뿐 아니라 배급사 통폐합으로 '조선영화배급사'를 설립한다. 이로써 제작·배급을 통제·장악하여 일제 시책에 부합하는 영상만을 만들어 영화를 군국주의 선전전용물로 전락시켜버린다.

변화와 실험

조선 영화 흥행의 시작을, 일본인이 제작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한 <춘향전>(1923)으로 본다. 이후 나운규의 <아리랑>(1926)'을 전환점으로 약 10여 년 조선인이 제작한 무성영화가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음향 기술 발달로 1935년을 전후, 발성영화가 서서히 안착을 시도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 창립(1939)기념작으로 제작되어 '황금좌'에서 개봉한 영화 '무정'의 광고 전단이다.
▲ 영화 "무정" 광고지 조선영화주식회사 창립(1939)기념작으로 제작되어 "황금좌"에서 개봉한 영화 "무정"의 광고 전단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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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명치좌가 일본인에 의해 건립(1936)된다. 명치좌는 특히 시설과 운영 측면에서 몇 가지 획기적 실험을 단행한다. 우선 상업영화관으로 1500석이라는 규모다.
 
모서리 출입부 2층과 3층 사이 '明治座'라는 한문이 또렷하다. 1층 입면과 1층과 2층사이 처마돌을 제외하곤 전체적 입면은 현재와 유사하다.
▲ 명치좌 모서리 출입부 2층과 3층 사이 "明治座"라는 한문이 또렷하다. 1층 입면과 1층과 2층사이 처마돌을 제외하곤 전체적 입면은 현재와 유사하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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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본 거류민 중심상권 명동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축 규모였다. 중심상업지역이란 토지이용 효율의 극대화 첨병에 다중집회 문화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이는 1930년대 후반 피식민지 수부 중심에 수탈형 자본주의가 본격 유입한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1300석 규모 약초극장(1935년 증·개축)과 1800석 부민관(1935)도 이런 자본유입을 더불어 예비한 신호였다.

명치좌는 또한 운영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 우선 변사를 없앴다. 이는 발성영화 상영이 가능한 음향 설비를 갖췄다는 걸 뜻한다. 또한 극장에 있는 다실 여급이나 극장시설을 안내하는 여급인 '오차코(お茶子)'를 없앴고, 아울러 조선인과 일본인 이용을 차별, 구분하던 관행의 벽을 과감히 무너뜨리려고 시도했다.

이는 상영된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영화 일색에서 벗어나 서양 및 조선 영화 비중을 늘려나갔다.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대지>(The Good Earth, 1938.02 상영)와 최인규 감독의 <국경>(1939.05 상영)이 대표적이다. 물론 지극히 상업적 행위의 발로였을 것이나, 문화소비에 있어 민족의 벽을 허물어 영화 관람층을 넓혀갔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 들어선 두 극장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사설 상업 영화관의 건축적 변화를 이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 황금좌와 명치좌 비슷한 시기 들어선 두 극장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사설 상업 영화관의 건축적 변화를 이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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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화가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진화해 그런대로 안정을 이루며 성장을 이루려던 시기, 중일전쟁(1937)이 터진다. 일제의 침략전쟁은 한반도를 수탈기지로 전락시켰고, 이에 따른 물자 품귀로 피식민지 영화산업은 격랑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린다.

명동예술극장

명치좌는 부민관과 더불어 서울에 남아있는 피식민지 집회문화시설이다. 해방 후 이 집은 국제극장, 시공관(市公館)으로 극장이란 명맥을 이어가지만,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이를 복구 명동예술회관(1957)으로 이름을 바꿔 국립극장으로 사용하다, 남산으로 국립극장이 이전한 후 금융회사 소유가 된다.

내부 개조는 물론 헐릴 뻔한 위기에 내몰리자 명동상가번영회 등이 서명운동을 벌여 간신히 살아남는다. 이를 문화관광부가 인수(2004)하여 시설을 복원, 명동예술극장(2009)으로 재탄생하는 곡절을 겪었다.
 
삼우설계의 리모델링 설계를 통해 연극전용 극장으로 재 탄생한 명동예술극장이다. 코로나19 대 유행으로 2022년 3월 현재 휴관 상태다.
▲ 명동예술극장 삼우설계의 리모델링 설계를 통해 연극전용 극장으로 재 탄생한 명동예술극장이다. 코로나19 대 유행으로 2022년 3월 현재 휴관 상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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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을 지은 일본인은 짧은 기간 단성사를 운영(1939)하기도 한 자였다. 설계랄 것도 없이 동경 아사쿠사에 있는 '다이쇼칸(大正館)'을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평면도까지 똑같았다 알려져 있다. 명치좌를 설계한 일본인은 황금연예관을 증·개축(1936)해 황금좌( 전 국도극장)를 세울 때도 이런 표절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직각사각형 창을 갖은 3개 층과, 옥탑을 이루는 꽃 문양이 장식된 둥근 창이 연출하는 출입부의 둥근 입면이다. 양쪽으로 분산되는 벽을 곡선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운 인상을 갖게 하였다.
▲ 출입부 입면 직각사각형 창을 갖은 3개 층과, 옥탑을 이루는 꽃 문양이 장식된 둥근 창이 연출하는 출입부의 둥근 입면이다. 양쪽으로 분산되는 벽을 곡선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운 인상을 갖게 하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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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특이하게 모서리를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출입구 전면에 곡면을 차용,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강조하였다. 부지 1670㎡(505평)에 건평 1048㎡(317평), 연 면적 2457㎡(743.413평)로 당시 45만 원을 들여 지었다.

지하 1층에, 지상 1∼4층까지가 통층인 액자형 무대(Proscenium)를 갖춘 극장이다. 1층 외부는 이용객을 위한 서비스 입면으로 2층과의 경계에 인조석 다듬돌(Cast Stone)로 짧은 처마를 냈다.

2층의 직각 창과 3층 및 4층의 크기가 다른 아치창, 그리고 현관 상층부를 원형으로 처리하는 등 자유분방함을 표현하였다. 전체 외관을 화강석과 타일로 처리하고, 여러 장식으로 화려한 입면을 구성했다. 단연 상업용 극장에 어울리는 외관이다.
 
한산한 명동 거리가 낯설만큼 한산한다. 두 길이 만나는 곳에 설치된 출입구를 중심으로 똑 같은 양측 입면을 갖고 있다.
▲ 원경 한산한 명동 거리가 낯설만큼 한산한다. 두 길이 만나는 곳에 설치된 출입구를 중심으로 똑 같은 양측 입면을 갖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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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리모델링은 1층 입면을 바꾸고 2층과의 사이 다듬돌 자리에 경관조명을 설치해 현대적 세련미를 더했다. 이때 집은 552석 규모 연극전용 극장으로 재탄생한다.

1930년대 중반, 비록 일본인 손에서 태어났으나 여느 극장과 다른 모습으로 분명 한 단계 수준 높은 건축과 영화 문화를 보여줬다. 또한 제약적 이용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피식민지 서민에게 문화적 영향을 끼쳤음도 분명하다. 곡절을 겪고 다시 태어났으니, 부디 공연 문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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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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