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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밭가에서. 이윽고 뙤약볕의 열기와 매미 울음소리가 절정에 도달할 즈음 푸른 오선지 같은 밭고랑을 타고, 또랑에서 가재를 잡는 소년에게로 건너오는 노랫소리. 그것은 콩밭 매는 동네 아낙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그 소리는 창창하거나 팽팽하지는 않았지만 기세등등하던 매미 울음소리마저도 잦아들게 했다. 말하자면 삶의 고달픔과 서러움 같은 것들이 뱃속에서 응어리가 되어 떠돌다가 노래의 몸을 입고 입 밖으로 빠져나와 콩잎을 흔들며 건너오는 소리였다.

구성지면서도 찰지고 찰지면서도 구슬픈 기운을 지닌 그 노래는 출렁거리며 건너왔는데 그 출렁거림 속에는 묘한 흥겨움마저 들어있어서 듣는 이의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했다. 슬픔과 흥이 묘하게 결합된 소리는 여울지듯 물결치면서 꺾어졌다가 흘러내리고 흘러내리다가 다시 꺾어지곤 했다.

그때 또랑에서 가재를 잡던 그 어린 소년은 들려오는 노랫소리의 꺾어짐과 흘러내림의 마디마디에서 난생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터득한 감정이라기보다는 몸이 먼저 터득해 버린 묘한 감정이었다. 슬픔 속의 오지를 한 번도 다녀온 적이 없었던 소년은 그 감정이 자기 핏속에 잠들어 있던 먼 조상들의 흥과 슬픔이 그 노래에 의해 깨어나면서 솟아나는 감정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그 노랫가락은 다름 아닌 진도 아리랑.

영화 <서편제> 중, 유랑의 소리꾼 가족인 아버지와 아들과 딸. 세 사람이 청산도의 밭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담길에서 풀어놓던 노랫가락도 진도 아리랑이었다.

아버지가 어깨춤을 추며 매김소리 선창.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 속엔 수심도 많다~'

'덩실덩실 춤사위를 펼치며 딸이 매김소리의 다음을 이어 받는데,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그러자 아들이 북소리로 장단을 맞추며 후렴구에 더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돌담길의 초입에서부터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롱테이크로 끝없이 이어지는 매김소리와 후렴구, 북소리와 춤사위의 긴 흐름!

청산도 서편제길. 이 길이 청산도에서 가장 인기다. 

비애와 탄식, 흥겨움과 신명을 묘하게 교차시키면서 길게 이어져오던 노랫가락이 그 사잇길의 끝지점에서 마침내 끝이 나고 그들이 다른 길로 접어들어 뒷모습을 감추었을 때, 그들이 떠나버린 그 적막한 길목에서 흙먼지 한줄기가 바람에 몸을 일으켰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노랫가락이 물러간 자리에서 일었던 그 사소한 흙먼지가 울컥 눈물을 삼키게 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 하찮은 흙먼지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아득한 어머니들의 밭고랑 사이에서 일었던 흙먼지이면서 그들이 밭고랑에서 불렀던 노랫가락의 슬픈 여운이자 애닯은 잔상으로 나를 키우기 위한 어머니의 갖은 정성과 사랑이 오버랩됐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슬픔과 몸의 슬픔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마침내 마음의 슬픔이 몸의 신명에 덧대어지기도 하면서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소리의 맥박으로 가장 한국적인 정한의 원형질을 가진 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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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는 청산도 해녀가 숨을 참고 깊은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차 물 밖으로 나올 때 '호~이'하고 휘파람 소리를 내뿜는 숨비소리이기도 하다.

청산도 해녀들은 "어떤 사람은 복도 좋아 앉아서 살고. 우리네는 바람이랑 밥으로 먹고 구름으로 똥을 싸고 물결을 집안 삼아, 부모 동생 떼어놓고 바다에 든다."

"물질을 해서 소를 살까, 밭을 살까. 한 손에 빗장, 다른 한 손엔 호미 들고 미역, 생전복 따다가 어린 새끼 멕이고 공부시킬려고 힘들어도 바다 위에서 시달리는 불쌍한 이내 몸뚱이... 다시 태어나면 좋은 세상 만나 남들처럼 잘 살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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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우게서 삼십년, 물 아래서 삼십년" 

청산도 해녀들은 그 만큼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낸다는 말인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시사철 물에 든다. 보름마다 되풀이 되는 무수기(썰물 때와 밀물 때의 물 높이의 차)에 따라 조(潮)금 전후한 엿새나 이레쯤 물질을 쉰다.

물속에 잠수해 있는 시간은 1분 5초에서 1분 50초가량. 최고 3분까지 가능하다. 20미터 물속까지 내려 갈 수 있지만 대부분 수중 5.5미터에서 작업한다. 이 잠수를 30회 내지 70회 정도 반복해 작업하고 난 후, 뭍으로 올라온다. 그리곤 해변가에 불을 쬐면서 몸을 따뜻하게 한 다음 다시 작업하러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몸이 튼튼한 해녀는 하루 3회 또는 4회 정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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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해녀의 수는 많이 줄고, 해를 더할수록 줄어들 테지만 그녀들의 애잔한 삶은 깊고 푸른 바다만큼이나 오래도록 보전돼야 하며 또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청산도 해녀들이 푸른 물결 속에는 숨을 참다가 한 번의 큰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향해 호오이 호오이 쉬이익 쉬이익 호흡을 잡는 숨비 소리는 묘하게도 구슬픈 아리랑과 닮아 있다.

푸른 하늘을 향해 근심을 날려 보내고 설움과 한을 날려 보내는 숨소리! 너무도 일이 많아 고단한 삶이니 차라리 소로나 태어났으면 더 낫겠다는 한탄 섞인 청산도 해녀의 삶. 출산한 지 사흘만 지나면 물질에 나서야 한다는 숙명적인 그들의 삶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고귀한 생명성이다.

그 생명성은 하늘의 소리이자 흙의 소리, 그리고 사람의 소리이자 밭이나 논, 바다와 산에서 부르는 일소리며,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부르던 생사의 소리. 그리고 놀이판에선 모두가 하나가 되는 대동의 소리.

공중에서 부유하는 저 푸름의 숨소리 물을 보듬는 푸른 바다의 박동소리는 천년 전 소식을 담은 푸른 바람의 속삭임에 청산을 가르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생명을 향한 용트림! 시간과 공간을 교직하며 푸른 마음과 푸른 영혼이 만나는 소리! 

아! 들리지 않는가? 나는 자유하는 존재,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 

나는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존재, 내가 한 송이 꽃을 꺾는다면, 그것은 우주의 한 부분을 꺾는 일이요. 한 송이 꽃을 피운다면 그것은 수만 개의 별빛을 반짝이게 하는 일이라고.

청산은 말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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