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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대구에 갔더니 아니, 전라도 사람이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대놓고 무시하더라고."  

1938년생 85세 호랑이띠 최정님씨는 지역감정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최씨는 전북 순창군 순창읍에서 나고 자라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
 
그는 "남편 직장이 대구로 발령 나서 아이들 데리고 따라 나섰는데, 그 때 대구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이 왔다고 처음부터 엄청 차별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막내가 100일이 막 지났을 무렵이라 그 때가 1966년도였다"며 "내가 포대기에 막내를 업고 가서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호남'을 둘러싼 '비호남 지역주의'는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대통령선거에서 이용되며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최씨는 순창에서 낳아 데려간 2남 1녀를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대구에서 키웠다. 대구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5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남매 중 1938년 둘째로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최씨와 대화는 대구에서 고향 순창을 찾아올 때마다 이뤄졌다. 최씨는 지난 연말 김장김치 담글 때 큰언니댁을 방문했고, 올 3월초 부모님 제사 때에는 넷째 동생 집을 방문했다. 언니와 남동생이 순창읍에서 살고 있어 고향을 자주 찾는 편이다. 최씨는 순창읍의 유복한 가정에서 10남매(2남 8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내 밑으로 아들, 그리고 또 아들이 태어났어. 넷째 밑으로는 또 딸만 줄줄이 여섯이 태어났잖아. 할머니 할아버지,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아들 둘을 낳게 한 복덩이라고 얼마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겠어. 하하하."
 
10남매는 셋째와 넷째가 아들이고 나머지는 딸이다. 10남매는 거의 2년 터울로 태어나 맏이와 막내는 스무 살 차이가 난다. 큰딸 최정옥(87)씨는 과거 기억이 선명한지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둘째가 얼마나 예뻤다고. 근데 가시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서 서방이랑 연애를 하더니 결국 결혼까지 했잖아. 하하하."
 

최정님씨는 잘 사는 부모님을 둔 덕에 어렸을 때 먹고 사는 문제없이 고등학교를 전주여고와 광주여고에서 유학하며 마쳤다.
 
"전주여고 기숙사에 있었거든. 연애편지를 넣어뒀는데, 문딩이 가시내 친구들이 나 없을 때 몰래 편지를 빼서 봤어. 친구들이 모두 남편한테 관심이 있었거든. 사서 선생님한테 이를까봐 내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얼마나 무서웠다고. 여름방학 때 순창에 왔다가 (전주여고를) 안 가버렸어. 전주여고 1학기 다니다가 그래서 광주여고로 전학을 갔지."
 
언니 새 옷 입고 나가는 '밉상'
 
최씨 부모님은 큰딸만 중학교까지 보냈을 뿐, 아들 둘은 서울의 대학교로 보냈고 나머지 딸들은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첫째 최정옥씨는 이 대목에서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맏이라서 그랬는가, 어머니가 동생들 키우고 집안 일 하시는 게 너무 고생스러운 거야. 그래서 내가 어머니한테 그랬지. 제가 학교 그만 다니고 집안일 할 테니까 동생들은 학교에 보내시라고. 그 어린 나이에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기특하게도."
 
큰딸은 동생 최정님씨가 밉지 않은 듯 웃으며 옛이야기를 이었다.
 
"둘째가 방학 때 집에 오면 집안 일 좀 도우면 좋은데, 어느새 보면 쪼르르 나가 버려. 연애 하느라 정신없응게. 어매가 내가 집에서 만날 일만 하니까 좋은 옷을 많이 사 주셨어. 시방도 안 잊어부러. 새옷 아까워서 옷장에 잘 넣어놓으면, 둘째가 입고 딱 나가버려. 오메 밉상, 이런 밉상도 없어. 그러곤 종일 놀다 저녁 때 들어와. 내가 뭐라고 하면 말대답도 안 하고 또 가만히 있어. 속 터지제."
 
"전라도 사람이 너희를 잡아먹느냐"
 
최씨 여동생들은 몇 년 전 작고한 최씨의 남편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형부가 못 하시는 게 없으셨어, 팔방미인이셨어 진짜. 인물 좋으시지, 언변 좋으시지, 노래도 잘 하시고. 배울 만큼 배우셨지, 인품도 좋으시지. 정말 순창에서 손꼽히는 천상의 잉꼬부부였어."
 
최씨는 남편이 작고하기 전까지 항상 손을 잡고 다닐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대구에는 어떻게 가게 된 걸까.
 
"수자원개발공사에서 안동댐을 건설할 때 공사가 대구에 있었거든. 남편이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기자 생활도 좀 했고 또 순창에서 고등학교 영어선생도 했어. 그 때 어느 분이 수자원공사에 외국인 박사들이 몇 명 와 있는데 통역도 하고 사무도 보라고 남편한데 일자리를 추천해줬어. 그래서 대구로 가게 됐지."
 
최씨는 "대구에서의 첫 기억은 악몽 같았다"고 고백했다.
 
"남편이 대구에서 일을 시작할 때 술자리가 있었는데 전라도 얘기가 나왔는가 보더라고. 남편이 술상을 엎어버렸데. '뭣이 어째? 전라도가 어때서, 전라도 사람이 너희를 잡아먹느냐. 왜 무조건 사람을 무시하느냐'고 따졌다더라고. 그 날 이후 우리는 대구 사람들한테 절대 기죽고는 안 살았어. 우리를 한 번 겪어보고 '아, 이 사람들이 무시할 사람이 못 되는구나' 하고 나중엔 인정을 하더라고."
 
급하게 찾아 간 대구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최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운 뒤였다. 출가외인이 된 최씨는 5살, 2살, 갓 100일이 지난 3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했던 과거의 기억을 촉촉하게 더듬었다.
 
"대구에 갔을 때 내가 가진 게 정말 없었어. 그때 남편 첫 월급이 9000원인가 그랬어. 시어머니하고 아기들 셋, 남편하고 우리 여섯 명이 남의 집 아래채에 살았어. 벽에 창문 하나 있고, 바닥을 들추면 연탄불 갈고 내리면 마루가 되는 한 방에서 그렇게 살았어."
 
순창 '자수'로 대구에서 성공
 
1970년대 순창자수센터(현 순창군농업기술센터 건물 소재) 작품들(사진 제공-순창읍 조순엽). 최정님 씨는 ‘순창 자수’를 접목한 구슬 베개로 대구에서 성공을 거뒀다.
 1970년대 순창자수센터(현 순창군농업기술센터 건물 소재) 작품들(사진 제공-순창읍 조순엽). 최정님 씨는 ‘순창 자수’를 접목한 구슬 베개로 대구에서 성공을 거뒀다.
ⓒ 조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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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을 내다볼 없는 게 삶이다. 최씨는 어린 시절 순창에서 유명했던 '자수'를 익혔었다.
 
"남편 군대 가고 없을 때 순창에서 첫 애기 낳고 어느 날인가, 순창의 베개 딱지가 유명했잖아. 농업고등학교에서 자수 전시회가 있었어. 그때 동네 언니가 나보고 참가해 보라고 했어. 수를 놓는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내가 일등을 받았지 뭐야. 광주여고 다닐 때도 수예하고 가정 과목은 모두 100점을 맞았어. 내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좀 있었는가봐."
 
'순창 자수'는 대구에서의 삶에 전환점을 마련해 줬다. 최씨는 대구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돼 지인의 소개로 서문시장의 한 수예점에 자수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없이 사니까 돈벌이 되는 일은 뭐라도 하고 싶더라고. 한참 구슬 핸드백이 유행을 했어. 내가 구슬 핸드백을 만들다가, 베개 양쪽에 구슬을 달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때는 시집가면 원앙이 그려진 베개 몇 개씩 장만하고 그랬잖아. 구슬 베개를 어디서 구입을 하는가 알아봤어. 그러니까 서울 세운상가에서 가져오더라고. 남편하고 그걸 사려고 서울까지 갔었거든."
 
그가 만든 순창의 자수가 어우러진 구슬 베개는 대성공이었다.
 
"내가 구슬 베개 때문에 대구에서 수예점을 시작했어. 구슬 베개가 히트를 쳤어. 서울로도 올라가고, 대구에서는 없어서 못 팔았어 그때는. 이웃집 엄마들은 부업이 없어서 돈벌이가 안 됐는데, 내가 구슬 베개로 서문시장에 정착했지. 사람들이 나 보고 '인간승리'라고 그랬어. '전라도에서 온 색시가 구슬 베개로 대구에서 양옥집을 샀다'고."
 
순창과 대구에서 새겨온 85년 나이테
 
최씨는 형제자매와 함께 한 자리에서 말문이 제대로 트였다. 그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계속해서 떠났다. 6.25때 순창읍에서 피난 간 곳은 '순창군 유등면 쇠판리'로 기억했다. 최씨는 피난 이야기에서 '엄마 돼지'를 떠올렸다.
 
"그때 우리 집 돼지가 새끼를 뱄어. 새끼를 낳으려고 하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피난을 못 가신 거지. 어머니가 유등 쇠판리까지 밥을 이고 찾아와. 우리를 살리려고. 내가 어머니 따라 집으로 가려고 하면 언니가 안 된다고 혼냈어. 산속에 오래 있었어. 그게 기억이 나."
 
최씨와 형제자매가 기억하는 소풍은 순창군 일대의 남산대 귀래정, 대모암, 헹가리, 강천산 등지였다. 모든 순창 사람들의 공통된 추억이 어린 소풍지였다.
 
대구광역시남구청장 직인이 찍혀 있는 주민등록증.
 대구광역시남구청장 직인이 찍혀 있는 주민등록증.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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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담담하게 회상하는 최씨의 얼굴에는 굴곡진 주름살이 내려앉았다. 순창과 대구를 오가며 이어온 삶에는 85년이라는 선명한 나이테가 새겨졌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대구와 순창을 계속 오갈 것이다. 태어나 28년을 살았던 순창도, 57년을 산 대구도 그에게는 모두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마지막으로, 호랑이띠인 최씨에게 임인년 소망을 물었다.
 
"지역감정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했어. 전라도 사람이라는 눈총 때문에 이를 악물고 더 반듯하게 살아야했어. 바라는 건 별 게 아냐. 정치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면 안 돼."

덧붙이는 글 | 전북 순창군 주간신문 <열린순창> 3월 23일자에 보도된 내용을 수정,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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