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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내가  처음 도착한 곳도 제물포였고 첫 출장을 간 곳도 그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인천이라고 불리는 곳이죠. 1884년 초 여름, 내 눈에 비친 제물포와 그때 겪었던 일들을 불러내볼까 합니다. 먼저 6월 2일의 기억입니다.

햇살이 밝은 언덕배기에는 두세 개의 외국 국기가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항구는 활기차 보였습니다. 영국 함선과 일본 함선이 각각 한 척씩 정박해 있었고 몇 척의 정크선과 노 젓는 배들도 보였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75채의 일본집들에는 하층계급의 일본인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길에는 새 건물들에서 나온 폐기물들이 널려 있었고 진흙탕이 많았습니다. 조선인들은 모두 하얀 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아니 원래는 하얬었겠지만 이제는 검게 번들거리고 흙투성이였습니다. 남루한 조선인 짐꾼들이 어깨에 지게를 지고 이리저리 다니고 있었지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곧 싸울 듯이 거친 손짓을 하고 째지는 고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불안하고 불편했습니다. 나는 외딴 고도에 홀로 버려진 듯 고립감에 사로잡혔지요. 

두 블록 정도의 일본인 주거 지역을 벗어나면, 서양인 거류지가 나옵니다. 말이 좋아 서양인 거류지이지 집이 두 채 밖에 없는 황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곳을 넘어가면 한양으로 향하는 노변에 조선인 가옥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진흙과 풀로 만든 오두막으로 방바닥은 축축한 찰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주전자, 냄비, 옹기 그릇, 벌거벗은 아이들, 냄새 나는 음식, 남녀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곳 조선인들은 모두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길가에 상점을 차려 놓고 있는데 물건다운 것이 없어 상점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나는 서울에 도착한 지 17일 후인 6월 19일 처음으로 공무 출장을 제물포로 떠났습니다. 그곳의 상업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지요. 한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였는데 대부분 걸어서 갔습니다. 28마일을 걸어서 도착하니 오후 4시 반이었습니다.  

이틀간을 제물포에서 지내면서 이리 저리 조선인 집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것들을 탐문했습니다.

서울로 돌아갈 때엔 조랑말을 탔습니다. 한참 가던 중에 말 잔등 위에서 불현듯 상상 속의 연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망아지가 나를 내동댕이쳐버렸답니다. 진흙탕에 곤두박질치고 말았지요. 다행히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온 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써야 했답니다. 

서울로 돌아 오자 곧 트렌턴호로부터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보든Bowden소위가 병사하고 말았다는. 배가 제물포에서 나가사키로 향발하기 직전인 6월 24일에 출혈성 홍역(black measles)으로 급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그와 함께 해군부 도서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를 잘 알았지요. 그는 진실되고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용한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지요. 

그는 매우 뚱뚱했는데 그래서 홍역 열이 발생하자 기공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합니다. 그의 부음에 나는 슬픔을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제물포에 비석도 없이 매장되었는데 14개월 후 미 함정 마리온호USS Marion가 유해를 발굴하여 나가사키로 이송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제물포를 찾아간 것은 7월 28일이었습니다. 한 달 십여일 만에 다시 찾은 것이지요. 우편물도 수취할 겸, Alert호도 방문하고 제물포도 다시 둘러볼 겸 해서였습니다. 헌데, 제물포에 도착해 보니, 아뿔사, 내가 제물포로 가고 있던 도중에 우편물을 실은 Alert호가 한양으로 떠났더군요.  

다음 날은 제물포에서 혼자 일을 보았고 그 다음 날인 30일 종일 Alert호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폭우가 쏟아지더군요. 그렇게 지독한 비는 난생 처음 보았답니다. 사흘 동안 내리 쏟아졌고 그 때문에 발이 묶여버렸지요.

그 기간 동안 내내 나는 시끄러운 일본 호텔에 묵었답니다. 장대비가 줄곧 쏟아지니 도대체 문밖을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호텔에서 본 일본인들은 혐오감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부모님 앞 편지에 이렇게 썼답니다.

"이 일본인들은 최악입니다. 온갖 악행을 일삼는 저질 불한당들지요. 일본의 쓰레기들(scum of Japan)이 조선인들을 편취하기(swindle) 위해 여기로 건너온 것이랍니다. 그 자들과 조선인들 사이에 온종일 호텔에서 소란이 이어졌습니다. 욕설과 주먹이 오가고 흉기가 등장하여 험악한 분위기였지요."

그곳에 서양인들도 스무 명 정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어서 나는 그들과 섞이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나는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들 속에 앉아서 문 밖으로 을씨년스러운 마을과 항구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지요. 흙탕길 위에 황새 두어 마리가 발 하나를 들고 엄숙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지루한 비가 그치자 말을 타고 서울을 향해 8마일쯤 갔을 때에  거리가 온통 범람하여 다시 제물포로 되돌아가야 했지요.

다음날 출발하여 한양에 당도하였지만 그건 실로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흙탕물과 홍수 속에서 두 차례나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까요. 그 와중에 나는 희한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답니다.

나는 한양 가는 길에 말에 걸터 앉아 중국식 기타를 연주하였답니다. 그러던 중에 어여쁜 일본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매우 예쁜 물결 무늬의 짙은 비단옷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주위에는 조선인 마부 두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다가가 일본 말로 인사를 건넸죠. "이 험한 길에서 고생이 많겠군요". 일본 말을 듣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밝아지더니 날더러 동행해달라고 청하더군요. 그녀는 제물포에 정박한 일본 증기선 사람들의 요청으로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간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 잔등 위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광경이 내게는 매우 낭만적으로 보였습니다. 나룻배를 타기 위해 말에서 내릴 때 혹은 말이 건너기 힘든 물웅덩이를 건널 때에는 내가 그녀를 말에서 내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동행 기간 중에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녀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습니다. 저녁에 헤어질 때 그녀는 놀랍게도 울음을 터뜨리면서 내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다시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말았지요.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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