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어떻게 시작됐나. 3월 20일 오후 방송된 KBS1 <역사저널 그날> 352회에서는 '철의 장막 소련 70년(1) 소련의 탄생-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의 시작' 편이 다루어졌다.
 
2022년은 소련이 결성된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해다. 70년간 존속하며 역사상 최초,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로 꼽히는 소련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이 하나로 모여 이룬 연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를 모태로 전성기 시절에는 총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었고, 우크라이나 역시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어있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는 역사학자들은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체제가 무너진 1991년을 사실상 20세기의 끝'으로 본다고 할 만큼 남다른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둔 지난 2월 21일 연설을 통하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역사적 일부"라고 주장하며, 소련 시절의 지도자인 레닌과 스탈린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들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성을 인정해준 것 때문에  지금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불만을 드러낸 것.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러시아-우크라이나는 고대 기마유목민족 스키타이에서 유래한 슬라브 인종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882년 스키타이의 후예인 슬라브인이 형성한 최초의 국가인 키이우(키예프)루스(882-1240)가 탄생하며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원이 됐다.

우크라이나는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고난의 역사를 이어왔다. 키이우루스는 1240년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하며 킵차크 한국의 판도에 속하게 됐다. 몽골의 통치에서 벗어난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중반에는 드니프로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 서쪽은 서유럽의 영향권, 동쪽은 러시아 영향권이 강해진 배경이다. 또한 18세기에는 러시아의 영향권이 점점 확대되며 영토의 대부분이 러시아에 귀속된다.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1922년에는 러시아 제국을 이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다. 1991년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70년 만에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고대하던 독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큰 비극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크라이나가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키예프가 키이우로 바뀌는 등 그동안 러시아식으로 표기되던 지명이나 이름들의 우크라이나식 표기가 제대로 알려진 것도 대표적인 변화였다. 강인욱은 "우크라이나가 생긴 지 30년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바뀌었다"며 씁쓸해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전세계 곳곳에서는 우크라이나의 국기를 활용한 '평화의 빛' 메시지들이 쏟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기에서 상단의 파란색은 푸른 하늘, 하단의 노란색은 황금빛 농토를 상징한다. 우크라이나는 밀-콩-옥수수 등 농업생산으로 유명하며 세계 곡물시장의 약 10%를 차지하는 세계적인 곡창지대다. '유럽의 빵바구니'라는 유명한 별명 속에는 풍요로운 땅을 상징하는 찬사와 함께 한편으로 누구든 가져가기 쉬운 목표물로 취급받았던 우크라이나의 아픈 역사도 담겨져 있다.
 
소련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19세기말-20세기초를 거치며 러시아 제국은 전제정의 한계와 부정부패, 빈부 격차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당시 유럽에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있던 반면,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 독재에 의존하는 후진적인 전제정을 고수하며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류한수는 "불만이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념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며 "유럽에서 전파된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 내 사회불만과 결합하여 불꽃을 유발했다"고 분석했다. 당시 제정말기의 러시아는 산업의 발달로 봉건제와 자본주의의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 있었다.

마르크스는 소수의 자본가들이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가 권력을 잡는 '사회주의론'을 제시했다. 지금이야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론으로 판명났지만 당시 빈부격차가 심했던 러시아 사회에서 노동자들에게는 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도화선이 됐다.
 
레닌은 19세기에 마르크스의 이론을 20세기에 보완-완성한 인물로 꼽힌다. 지금도 러시아 내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레닌이 더 추앙을 받는다고.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공산당)를 지지한 '10월 혁명'이 성공했다. 마르크스 사상에 입각한 세계 최초의 혁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그 중심에 바로 레닌이 있었다.
 
혁명의 영향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통일된 호칭으로 따바리쉬(동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소련이 몰락한 지금도 따바리쉬는 공산주의 시절의 의미와는 별개로 '친근한 사이'를 뜻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국에서 '동무'라는 표현이 6·25전쟁 직후 본래의 의미와 달리 북한을 연상하는 말로 굳어져서 금기시되면서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도 낯선 표현이 된 것을 감안하면 뭔가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레닌은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희망을 준 존재였다. 절대권력을 누렸던 스탈린이 사후에 모든 동상과 도시명이 교체되며 터부시되었던 것과 달리, 레닌은 여전히 러시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강인욱은 그 이유로 "전제정의 질곡을 끊어준 것도 있고, 혁명 이후 일찍 죽으며 권력 말기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레닌은 사후에도 스탈린, 호치민 등 공산정권 지도자들과 함께 시신이 미라로 영구보존되며 고고학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미라 연구가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푸틴 똑같은 비극을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르고 있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러시아 공산당은 1918년부터 외세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혁명세력과 4년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결국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 이후 흩어진 민족국가들을 공화국 형태로 결집하여 1922년 10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한다. 소련이 성립될 때 러시아 다음으로 합류한 나라가 아이러니하게도 우크라이나였다.
 
여기서 레닌이 우크라이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이유는, 제정 시절을 포함하여 역대 러시아 통치자 중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민족성을 인정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레닌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족자결주의'의 핵심은 '각 민족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수 없다'는 것. 대한민국 3.1운동의 명분적 기반이 된 윌슨 미국 대통령보다도 더 앞서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인물이 바로 레닌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소수민족들을 탄압하여 '민족들의 감옥'으로 불리웠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러한 러시아의 민족 정책을 비판해왔기에, 소련 체제에서는 변화된 관계정립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동행은 또다른 비극을 불러왔다. 1924년 레닌의 사망으로 집권한 스탈린은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로 러시아가 아닌 소수민족인 조지아 출신이었다. 얄궂게도 소수민족 출신으로 소련의 권력을 잡은 스탈린이 이후 우크라이나에 누구보다 큰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묘한 운명의 아이러니가 됐다.
 
스탈린은 "우리는 선진국에게 50~100년 뒤떨어져 있다. 이 격차를 10년 안에 따라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도 높은 경제개발계획을 제시했다. 당시 농업 위주의 주력산업을 공업으로 바꿔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1920년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대치하여 고립된 상황이었고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강제적인 국민 소비 절감과 저축, 농업생산물을 국가가 수탈하여 수출하는 방식을 썼다.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가 바로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였다.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 KBS1

 
1932~1933년 우크라이나를 강타한 '홀로도모르' 대기근이 발생한다.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이 초래한 대표적인 비극으로 꼽히는 홀로도모르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어갔다.
 
그중에서도 우크라이나가 받은 피해는 특히 컸다. 정확한 희생자의 수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수백만명이 대기근 동안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견디다 못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단체로 탈출을 시도하자 스탈린은 그마저도 국경을 봉쇄하며 차단했다.

자칭 '사회주의 낙원'을 선전하던 스탈린으로서는 소련의 실상과 자신의 치부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국민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국가는 강제로 뺏은 식량을 다른 나라에 팔아 이익을 올리는 말도 안되는 일이 실제 역사에 벌어졌다는 데 패널들은 모두 안타까워하며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허울뿐인 연방이라는 체제에서 일부 민족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현실은, 분노와 함께 민족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각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침공을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오히려 환영했던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세워진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추모비에는 우크라이나의 상징인 밀밭을 묘사하며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두고도 굶어죽어가야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한을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참혹한 희생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뤄낸 소련은 2차대전에서 독일에 승리할 수 있는 국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원정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알고나니 전쟁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진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러시아는 홀로도모르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보상에 대하여 '러시아도 소련의 일부였고 지금은 연방이 해체된만큼 책임의 주체가 없다'는 논리로 회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시원은 "우크라이나인들은 너무 억울할 것 같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인데 이런 비극은 다시 없어야한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허준은 "역사를 배울수록 그 역사의 무게가 느껴진다"고 이야기하며 "전쟁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우크라이나를 가볍게 다루거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알고 나면 이 비극에 대하여 절대 가볍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또한 허준은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역사를 비교하며 "약소국에게 결정권은 없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최태성은 "역사의 무게란 이런 것이다. 역사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역사는 이렇게 늘 소환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강인욱은 아이러니하게도 푸틴이 수백만명의 전사자를 남긴 레닌그라드 전투가 벌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임을 언급하며 "푸틴은 똑같은 비극을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고 성토했다. 이어 강인욱은 "20세기 슬라브인들의 역사는 너무나 많은 피로 점철되어 있다. 빨리 전쟁이 끝나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같은 슬라브인으로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온라인에서 한 우크라이나인 할머니의 사진이 큰 화제가 됐다. 올해 98세라는 이리나는 "나는 히틀러과 홀로도모르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푸틴에게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는 메시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사진을 남겼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과, 그럼에도 꺾이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민중의 강인함이라는 교훈을 일깨우며 많은 이들을 뭉클하게 했다.
우크라이나 푸틴 레닌 홀로도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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