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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진구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자료사진.
 서울 광진구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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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옥하다 학생 ○○대학 ○○○동문 장학생에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장학생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동문 장학금은 재작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동문의 부모님이 자식을 기리며 조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미래 학비로 내가 대신 학교를 다니는 셈이었다. 아버님의 마음을 생각하니 먹먹하고 어깨가 무거웠다.
 
한 달 전 장학금 신청서를 내러 갔을 때, 조교님은 내가 선정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다. 소득 분위가 문제였다. 장학금의 취지가 '학업에 뜻이 있으나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학비 보조를 필요로 학생에게 지급'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해당되지 않았다.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을 때, 혹시나 가정형편이 정말 어려운 친구가 받아야 할 학비를 내가 쓰게 된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내 학비를 못 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더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돈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교님께 바로 연락을 드렸다. '혹시 저 때문에 가정형편 어려운 친구가 장학금을 못 받지는 않았겠죠?' 조교님 말씀으로는, 본과를 포함해 여러 명이 신청하였으나 먼저 가정 형편을 파악한 후, 학업과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위원회에서 결정했다고 했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었을 것이다.
 
순간 내가 다니고 있는 의과대학에 위화감이 들었다. 적지 않은 수의 일반적인 대학생들이 학비가 없어 대출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한다. 심지어 일부는 생활비가 부족해 생활비 대출을 받기도 한다. 집에 빚이 있는 학생이 생활비 대출을 받아 본가의 생활비로 송금하다가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댔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의과대학은? 형편이 어렵지 않은 내게 장학금이 지급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우리 대학에 '학업에 뜻이 있으나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학비 보조를 필요로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아닌가. 

의과대학 학생들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 조사
 
2020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중위소득의 100분의 50 이하인 인구는 전체의 17.4%라고 한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전체 인구의 9%가량, 차상위계층은 전체 인구의 8.4%이다. 거칠게 말하면 인구 다섯 중 하나는 중위소득 이하로 살아간다. 
 
내가 느낀 위화감과 낯설음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300명 남짓한 사립 의대에서 대한민국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귀찮은 누군가 신청을 안 했다고도 생각해보려 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 의대를 다니는 친구라면 이런 것을 꼼꼼히 챙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위화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나만 느낀 것도 아니었다. 일반 대학에서 흔히들 받는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을 받았다는 사람을 우리 의과대학에서는 찾기 힘들었다. 서울 모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교실에서 이런 '느낌'을 수치적으로 분석한 작은 설문조사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의 사회 경제적수준을 수집했는데 결과가 재미있다.
 
먼저 의과대학 학생이라는 집단은 '지역적 편향'이 있었다. 대부분 학생들의 거주지는 서울이었고, 특히나 강남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울 의과대학만의 특징이라 하기에는 대전 지역 의과대학인 우리 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본가가 서울에 있다.
 
두 번째로 이 집단은 '부모의 직업 편향'이 있었다. 실제로 주위 많은 친구들의 부모님이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등의 의료 전문직이다.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검사 등의 법조계 전문직도 상당했다. 국회의원의 아들, 공공기관 장의 아들들도 드물지 않다.
 
세 번째로 이들은 '인종, 성적 지향 편향'이 있었다. 전 인구의 5%가량을 차지하는 외국인, 비슷한 비율의 다문화 가정이 의과대학에는 드물었다. 익명의 조사였음에도 성적 지향성은 이성애자가 압도적 다수였다. 
 
의학 교육학 교실에서는 이러한 근거로 의과대학생들이 '편향된 코호트 집단'이라 결론지었다. 그리고 의과대학이 더 다양한 인구 집단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에 부모님이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변호사, 판사, 국회의원, 기관장인 이들이 몇이나 될까. 조사를 읽고 나니 21세기 한국의 의과대학이 새로운 귀족 학교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정하다는 착각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똑똑하고 성실한 이들이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고, 그들의 자녀들 또한 부모처럼 노력하여 좋은 대학을 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였을 때, 과거 세대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온전히 그들의 지능과 성실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운이나 그들의 부모가 물려준 사회, 문화, 경제적 배경의 영향은 없었을까. 그것들을 온전히 배제한 채 그들의 사회적 지위, 성취를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지금 의과대학생들은 정당한 '경쟁'을 통해 '노력' 하여 온 '똑똑한'사람 아니냐고 말이다. 만약 할당제를 적용한다면 의과대학의 수준이 낮아지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미 유수의 석학들이 이를 과학적, 통계적으로 반박해놓았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다니엘마코비치의 <엘리트 세습>은 인용하기에도 식상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산골 고등학교의 예를 들어주고는 한다. 아버지가 모 자동차 그룹의 파산으로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생활을 했던 친구가 있었다. 몇만 원 안 하던 교재비며 등록비며 내기 어려워 선생님이 신경을 써 주시던 기억이 난다. 기숙사 대표를 할 때면 십 몇만 원의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 울며 기숙사를 포기한 친구들이 흔치 않게 있었다. 

가을이면 부모님의 포도 농사나 사과 농사를 도와드려야 해서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친구도 흔치 않게 있었다. 그 개개의 사정을 듣고 있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첫 문장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한 친구들과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과연 '공정한' 경쟁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개중에 정말로 '똑똑한'사람은 없었을까. '산골 고등학교 친구'들이 '4000만 원짜리 기숙 학원을 다니며 아무런 돈 걱정 없이 공부 한 사람'에 비해 '노력'을 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강남의 명문 학원을 다니며 내신, 수능 자료를 받던 친구와 교육방송만 보던 친구를 같은 잣대-수능, 논술,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말로 '정당'한 일일까.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우리 사회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시험을 잘 친 이들에게 과도한 부와 명예를 부여해왔다. 승자는 그 과실을 당연하고 정의롭게 여기며,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이 '정당'한 경쟁의 결과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경쟁에서 패자는 패배의 고통에 더해 '공정한 경쟁에서 졌다는' 자기 비하적 굴욕을 겪는다. 
 
앞으로 의사가 되어 마주하게 될 환자들의 사회, 경제, 문화적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이다. 1년 조금 넘는 짧은 병원 실습을 돌았을 뿐이지만, 드라마 몇 편은 쓸만 한 다양한 사연의 삶들을 접했다. 집이 없이 떠도는 가족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있다. 성적 지향의 문제로 따돌림을 당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있다. 문화적 차이로 사회에서 배제당한 채 정신병이 생기고, 그 병으로 인해 다시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의과 대학의 구성원들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갈라파고스화'된다면 이들을 진심으로 연민하고 이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을까. 나는 미래의 내가 오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친 의사가 되어 힘없고 약한 이들의 아픔을 당연하다 여기게 될까 진심으로 두렵다. 
 
물론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균일하다 해서 약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의 삶과 경험을 체험하고 공감할 수 있다. 방학이면 시골이나 보건소로 봉사를 가는 동기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위기, 시리아 위기 같은 위기 때마다 동기들의 돈을 모아 수백수천을 만들어 기부하는 선배 이야기도 내게 감동을 주었다. 모두 용기 있는 훌륭한 행동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으로 겪지 않으면 그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의과대학 구성원에 포함해야만 한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구글,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에서도 다양한 창의적 의견, 고객 소통 등을 이유로 여러 사회, 문화, 인종, 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채용한다. 의과대학의 학생 선발이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편평하게 만드는 법
 

개인의 훌륭한 실천적 행동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이 한 사람의 행동만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양쓰레기의 예를 들어보자.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개인이 종이 빨대를, 텀블러를 쓰는 일은 훌륭하지만 그것이 해양 쓰레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아니다. 그보다는 플라스틱 그물을 사용하는 다국적 수산 기업체에 시민사회나 국가가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해양 쓰레기 문제 해결에 백만 배 효과적이다.  
 
이미 한국은 인종적, 문화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다. 이런 곳에서 소득, 지역, 성적 지향마저 동질화된 괴물 유전 집단을 생산하는 것은 위험하다. 유전적으로 단일한 개체는 건강하지 못하다. 사회에도,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도 이질성과 다양성은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엘리트를 선발하는 제도는 범 사회적 논의를 통해 개선되어야만 한다. 전문직이나 엘리트를 '능력'만으로 선발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능력주의는 이론적으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한 인간이 받은 사회, 문화, 경제적인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공정하다는 착각'만 줄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여기는 민주주의 사회이니,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떠한 차원에서는 소수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 이성애자, 서울 거주, 남성이라는 주류 집단이라 하더라도 간호, 교육 직종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다수의 폭정으로만 세상이 운영된다면, 나 또한 얼마든지 그 피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사회의 단면들이 다양하듯, 엘리트 집단에서도 그 다원성을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농부 출신 의사, 남아시아계 한의사, 성소수자 변호사가 필요하다.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방식이 특정 집단에게 유리하다면, 가산점을 줘서라도 그 결과를 보정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를 공산주의, 좌파적 사고라 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다.
 
완전한 이상적 평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안다. 공산주의 실험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결과에서 최소한의 공평성, 다양성, 정의를 보장하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부모의 금전적 지원, 문화 자본의 차이가 있다면 국가가, 대학이 개입하고 교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정 인종, 경제, 문화, 사회, 성별 계층이 부족하다면 그들에게 우리의 옆 자리를 조금 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종이 빨대와 텀블러보다 다국적 수산 기업체의 그물 사용을 줄이는 것이 해양 쓰레기 감소에 효과적이다. 시민 사회의 조직된 힘과 압력, 그 총의인 국가의 개입이야말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개별화된 인간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연대와 시스템의 변화다.

덧붙이는 글 | 류옥하다 기자는 스물 셋, 의대 본과 4학년 졸업반 학생의사입니다.


태그:#공정하다는착각, #공정, #정의, #엘리트세습, #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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