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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의 신사당
 포충사의 신사당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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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강원도 산간과 경기북부 일부 지방에 봄을 시샘하는 폭설이 내렸지만 입춘, 우수, 경칩 다 지났으니 누가 뭐라 해도 분명 봄이다.

정가의 봄은 아직 멀리 있지만, 계절의 봄이 유난히 일찍 찾아온 남도 땅.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압촌 마을 제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포충사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포충사 가는 길가 민가의 정원에 붉다 못해 검붉은 홍매화가 길손들을 유혹한다
 포충사 가는 길가 민가의 정원에 붉다 못해 검붉은 홍매화가 길손들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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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봉 고경명 선생(1533∼1592)과 그의 장남 준봉 고종후(1554∼1593), 둘째 아들 학봉 고인후(1561∼1592) 등 3 부자와 월파 유팽로(1554∼1592)와 청계 안영(1564~1592)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祠堂)이다.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로 조성된 포충사는 크게 옛 사당과 새로 지은 신사당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1980년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신사당 경내에는 사당과 유물관 그리고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포충사의 정문 충효문 옆에 노란 산수유가 활짝 피었다
 포충사의 정문 충효문 옆에 노란 산수유가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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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의 산수유
 포충사의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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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 정문인 충효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수형이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관람객들을 맞아주고 내삼문인 성인문을 통과하면 새로 건립한 포충사 신사당과 마주하게 된다. 사당에는 고경명 선생의 영정과 함께 다섯 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내삼문 전면에는 약 7000여 평의 넓은 잔디밭과 공원이 수려하게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애용하고 있다. 봄·가을이 되면 유치원 원아들의 체험 학습 장소로 인기가 좋은 곳이다.

왜군과 맞서 싸운 고씨 가문 
 
옛 사당에서 내려다본 신사당의 모습
 옛 사당에서 내려다본 신사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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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의병 7천 명을 이끌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인 고인후와 종사관 유팽로·안영 모두 고경명 장군과 함께 전사했다.

큰 아들인 고종후만 겨우 살아남았으나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그는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옛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오래된 낙랑장송으로 뒤덮여있다
 옛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오래된 낙랑장송으로 뒤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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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아름다운 단풍나무 숲길을 지나면 옛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온다. 옛 사당으로 오르기 전에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 옆에 자연석으로 다듬어진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충노(忠奴) 봉이(鳳伊) 귀인(貴仁) 지비'라 새겨져 있다. 고경명 선생 가문의 노비였던 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비석이다.
 
옛 사당으로 오르는 홍살문 옆에 세워진 충노비
 옛 사당으로 오르는 홍살문 옆에 세워진 충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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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선생의 집안 노비로 있다가 주인과 함께 의병에 참여했다. 1592년 1차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 부자가 전사하자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그 이듬해 다시 고경명의 큰 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인물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고씨 가문에서 비석을 세워 이들의 충의정신을 기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양반집 사당 앞에 노비를 기리는 비석이라니. 그 가문에 그 노비들이다.
 
포충사 옛 사당
 포충사 옛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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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당 앞 동백
 옛 사당 앞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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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당 주변은 오래된 낙랑장송으로 뒤덮여 있어 조경이 매우 아름답다. 경내에는 사당과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옛 사당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시국이 안정된 1601년 건립되었다.

호남의 유생들은 고경명 선생의 생가가 있는 압촌 마을 제봉산 기슭에 선생과 두 아들을 비롯한 충의의 인물들을 모실 사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1603년에 박지효 등 문인들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자 선조는 '포충(褒忠)'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포충사 옛 사당 아래에 조성된 공원
 포충사 옛 사당 아래에 조성된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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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전남 지방 2개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고경명 선생을 주벽(主壁) 제향하고 동쪽에 고종후와 유팽로, 서쪽에 고인후와 안영을 배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충사 인근에는 고경명 선생이 태어난 생가터 '고원희 가옥'과 고씨 가문의 충의를 기리는 '고씨 삼강문'이 있다. 두 곳 다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와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깃든 포충사 
 
봄·가을이 되면 유치원 원아들의 체험 학습 장소로 인기가 좋은 곳이다
 봄·가을이 되면 유치원 원아들의 체험 학습 장소로 인기가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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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이 되면 광주를 찾는 정객들은 의례적으로 5·18 민주묘역을 참배하지만 한편으로는 5·18 정신의 뿌리가 되는 포충사도 함께 찾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지금 호남을 대표하는 호국선열의 유적지 광주 포충사에는 430여 년 전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며 마냥 감탄사를 연발할 수 없는 연유는 무엇일까. 두 아들과 노비를 잃은 청고한 선비의 영정과 아름다운 봄꽃들이 서로 겹쳐 보이는 봄날의 오후다.
 
옛 사당 앞 동백
 옛 사당 앞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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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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