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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여행안내 사진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많이 달라졌다. 고흥만간척지, 해창만간척지, 오마간척지 등으로 육지면적이 넓어졌다.
 고흥 여행안내 사진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많이 달라졌다. 고흥만간척지, 해창만간척지, 오마간척지 등으로 육지면적이 넓어졌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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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에 대해 연구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수군의 주축을 이뤘던 고흥을 방문하기로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이 치른 4대 해전에서 전사한 희생자 중 절반이 흥양현(현 고흥)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전남 동남단에 위치한 고흥군은 해안선이 744.66㎞나 되는 반도로 되어 있고 많은 섬을 보유하고 있다. 유인도 23개, 무인도 207개로 도서 면적만 해도 133.24㎢에 달한다. 동쪽은 순천만과 여자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시와 인접하고, 서쪽은 보성만과 득량만을 사이로 보성군, 장흥군, 완도군과 접경을 이룬다.
  
필자가 고흥에 있는 전라좌수영 수군진을 돌아보도록 도움을 준 장세선 고흥군 의회의장(전임)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송호철(우측)씨가 <선무원종공신녹전>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국회의원이자 건설부장관(전임)이었던 신형식씨가 소장한 것을 복사한 책으로 임진왜란 당시 고흥출신 수군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가 고흥에 있는 전라좌수영 수군진을 돌아보도록 도움을 준 장세선 고흥군 의회의장(전임)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송호철(우측)씨가 <선무원종공신녹전>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국회의원이자 건설부장관(전임)이었던 신형식씨가 소장한 것을 복사한 책으로 임진왜란 당시 고흥출신 수군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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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고흥반도 모습으로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모습이다. 바닷길로 접근하기 좋아 왜구의 침략이 잦아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수군진이 4개나 설치됐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고흥반도 모습으로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모습이다. 바닷길로 접근하기 좋아 왜구의 침략이 잦아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수군진이 4개나 설치됐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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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의 한 지맥이 벌교 부근에서 남하하면서 침강해 형성된 고흥반도는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3㎞밖에 되지 않은 좁고 낮은 지협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다. 흥양현을 그린 김정호 <대동여지도>를 보면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친 모양이지만 최근에는 고흥만간척지, 오마간척지, 해창만간척지가 조성되며 둥근 모양이 되었다.

바다와 접근성이 좋은 고흥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곳
 

바다와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약탈에 나선 왜구도 접근하기가 용이하다는 걸 의미한다. 고흥은 왜구들의 침략이 잦았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사절요>에 3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심했고 1388년에는 목사 이빈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녹도진은 연산군 3년 (1497년) 녹도에 침입한 왜구로 인해 만호 김세준과 군관 2인, 진무 5인, 군사 20여명이 전사하였고 정해년에는 왜적선 18척이 침범해 만호 이대원이 손죽도에서 전사했다.
   
여수 적금도에서 바라본 팔영대교  모습으로 팔영대교를 건너면 고흥이 나온다.
 여수 적금도에서 바라본 팔영대교 모습으로 팔영대교를 건너면 고흥이 나온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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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후기에는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실시했고 왜구의 상륙처였던 포두, 도화, 풍안 등지에 백치성, 독치성, 백석리장성 등을 쌓고 인근 백성들이 식량을 비축해 번갈아 가며 수비했다.

왜구들의 약탈에 골머리를 썩히던 조선 조정에서는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진과 성곽을 축성하고 봉수대를 만들어 통신망을 정비하는 한편 말을 기르는 목장, 염전, 봉산, 어장 등 경제적 통치시설도 만들었다. 전라좌수영은 성종 10년(1479년)에 여수에 위치한 내례포에 설치됐다. 전라좌수영의 다른 수군진들도 성종 16년(1485년)부터 성종 21년(1490년)사이에 완공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고흥수군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휘하에는 5관(순천, 광양, 낙안, 흥양, 보성)과 5포(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가 있었다. 전라좌수영에 속한 흥양현과 여도, 사도, 발포, 녹도 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승리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에 참전하자고 주장한 이들은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이었다. 다음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 3일 <난중일기>에 쓴 내용으로 녹도만호 정운이 한 말이다.
 
"전라우수군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데 적세는 이미 서울까지 박두하였으니 더없이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만일(해전에서도 제해권 장악의) 기회를 잃게 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녹도 군관 송희립 역시 "영남은 우리 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치는데 이 지역 저 지역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면 본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하자 전라좌수영 수군이 곧바로 영남 해역으로 출전했다.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했던 고흥 출신 전투 지휘관들에 대한 기록은 1662년에 쓴 <흥양읍지>에 나와있다. 송건, 최천보, 정걸, 송대립, 신여량, 송덕일, 송희립, 진무성, 송심, 송무상 등 확인된 인물로 총 195인이었다. 일반 향민들은 해상의병과 송대립장군 휘하의 육상의병으로 참여해 구국의 길에 나섰다.

반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일반 민중들은 전선 건조, 둔전 개간, 군기 마련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면서 고흥은 남해안 수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여수에서 승용차를 타고 고흥으로 여행했던 분들은 여수와 고흥이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해서 다음 지도를 이용해 좌수영성에서 고흥 4포까지의 거리를 직선거리로 측량해 보았더니 여도진 25.3㎞, 사도진 32.5㎞, 발포진 46㎞, 녹도진 60.2㎞로 지근거리다. 

4포중 전라좌수영과 가장 가까운 여도진

고흥에 위치한 1관 4포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고흥을 향해 출발했다. 필자를 안내할 분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고흥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송호철씨다. 여수에서 가장 가까운 여도진으로 가려면 여수에서 고흥까지 연결된 연륙교를 이용하면 된다. 10여년 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내비게이션을 보고 운전해도 쉽지 않아 몇 번이나 전화해서야 송호철씨를 만났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전라좌수영>지 속에서 발췌한 3D 사진으로 여도진과 여수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알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전라좌수영>지 속에서 발췌한 3D 사진으로 여도진과 여수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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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진 굴강 모습
 여도진 굴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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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진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여호마을 일대에 있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일대를 관할하는 전라좌수영의 중앙에 위치한 수군진이기도 하다. <호남진지>에 따르면 여도진 지형은 동·서 길이 10리, 남북 너비 7리, 동서북으로 큰 바다가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 흥양현이 육로로 40리 떨어져 있다.
            
 <흥양현여도진지도>에 그려진 여도진  모습
  <흥양현여도진지도>에 그려진 여도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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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진은 남쪽에 팔영산을 등지고 북동쪽에 원주도, 북쪽 조금 떨어져 내백일도, 가까이는 우모도와 계도, 동쪽에 항도로 에워싸인 천연 양항이다. 여도진은 서남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바다와 모두 접해있는 지형이며 원주도가 감싸고 있는 진의 북쪽에 선소, 굴강이 위치해 있다.

<호남진지>에 따르면 여도진의 선창포항은 밀물 때에는 배가 뜨고 간조 때에는 가라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불리한 조건 때문에 여도진은 좌수영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요건에도 불구하고 전라수영 좌도 도만호 정박처에서 일반 만호진으로 강등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도진 성벽 맨 아랫돌로 사용되었던 지대석들이 밭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여도진 성벽 맨 아랫돌로 사용되었던 지대석들이 밭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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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진 비석군으로 새마을 당시 주민들이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여도진 비석군으로 새마을 당시 주민들이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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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진성의 둘레는 1100척에서 670보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성종실록>과 <신중흥양지>를 제외한 문헌에서는 모두 110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밭을 갈고 있던 촌로 부부들에게 "성터를 보기 위해 왔다"고 하자 "저게 옛 성벽돌이다"고 가리켜 준 돌들을 보니 1미터가 넘는 돌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도진 성벽은 대부분 남아있으나 내부 건물지는 이미 전답 등으로 전환이 된 상태다.

여도진은 다른 수군진과 마찬가지로 고종 32년(1895년) 군제개편 당시 폐진되었다. 여도진 비석군은 현재 여호리 마을 입구 공동화장실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송호철씨는 "새마을 운동하면서 주민들이 한 곳으로 모아 둔 것"이라고 말했다. 

여도진을 둘러본 후 사도진을 향해 출발하면서 시간을 임진왜란 직전으로 돌렸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2월 19일부터 2월 25일까지 고흥에 있는 4개 수군진을 초도 순시한 후 전쟁준비가 부족한 사도진 첨사와 군관들을 벌주며 기강을 잡았다. 

왜구와 수차례 전투경험을 쌓은 고흥 수군의 전투력은 이미 왜수군을 능가했다.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과 이들의 노력이 임진왜란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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