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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인수위원들이 18일 오후 새 대통령 집무실 후보지인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를 둘러보고 있다.
 권영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인수위원들이 18일 오후 새 대통령 집무실 후보지인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를 둘러보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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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각지 인근에 자리한 국방부 옛 청사. 이 일대는 20세기 들어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한 점령지였다.
 서울 삼각지 인근에 자리한 국방부 옛 청사. 이 일대는 20세기 들어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한 점령지였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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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용산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왜 점령군들이 다 여기에 와서 진을 쳤는지 알겠더라. 여기는 너무 위치가 좋다. 그래서 미군이 주둔했나 보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1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용산 위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실제로 윤 당선인이 집무실을 검토하고 있는 용산 국방부 일대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 주둔을 시작으로 을사조약 1년 전인 1904년부터는 일제가 용산 일대를 위수지역으로 선포해 군대를 들이면서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이 점유한 곳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이어받아 용산 일대를 군사시설로 활용했다. 따져보면 임오군란이 있던 1882년부터 미군의 일부 기지 반환이 이뤄진 2020년까지 138년 동안 용산 땅을 외국군이 점유해 온 셈이다. 그만큼 군사적 요충지라는 뜻이다.

물론 우리 국방부도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을지로1가에 있던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청사로 잠시 사용한 뒤 조선 주둔 옛 일본군사령부(현재 신용산역 인근) 건물로 옮겨 용산 일대에 자리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함께 이전했다. 휴전 이후 다시 일본군 사령부 건물을 국방부 청사로 이용했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4년 뒤인 1966년 현재의 용산구 삼각지 부지(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향하는 방면)에 국방부 청사를 신축해 1970년 9월 옮겼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에 조금 더 안쪽에 신청사를 건립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당선인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며 청와대 집무실 이전 공약을 내놨다. 하지만 경호와 보안, 비용 등의 문제가 잇따르자 광화문 이전 대신 용산 이전이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유력 후보지가 삼각지역 인근 현재 국방부 신청사다.

용산, 침탈당한 역사
 
서울 용산 삼각지 일대에 자리했던 일본군 부대 모습.
 서울 용산 삼각지 일대에 자리했던 일본군 부대 모습.
ⓒ 식민지역사박물관 게시물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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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예로부터 외국군이 끊임없이 침탈하고 주둔했던 장소다. 지리적 특성 때문인데, 용산에서 가까운 한강을 통해 상륙한 뒤 남산과 북한산을 점령하면 서울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물길을 이용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의 역할도 했다.

이 때문에 13세기 고려를 점령한 몽고군은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용산을 활용한 이후 조선 선조 시기인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에서 패한 왜군 고니시 병력과 가토 병력이 각각 용산 일대를 점령해 주둔했다. 이후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가 이곳에 진을 쳤다.

1882년 구식군대 차별에 따른 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고종과 민비는 이를 진압키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청군은 앞선 전례에 따라 5000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용산에 주둔시켰다. 용산에 자리 잡은 청군은 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중국 천진으로 데려갔다. 이후 청군은 대원군의 임오군란 잔당을 토벌하며 '조선을 안정시킨다'라는 명분으로 용산에 계속 주둔했다. 이때 청군을 이끌며 실질적인 조선 총독 역할을 했던 인물이 우리가 잘 아는 원세개(위안스카이)다.

이후 일본은 용산 일대를 군 전용지로 바꾸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군용지로 강제수용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등을 지었다. 일본군은 1907년 사격장을 시작으로 매장장과 화장장, 군용도로, 연병장, 창고, 위수병원, 병기지창, 군악대 청사, 기병중대 병사, 야포병중대 병사, 군사령관 숙소 등도 순차적으로 건립했다. 

2016년 7월 용산문화원 향토사학자인 김천수씨가 발견한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 등 문건에 따르면, 1906년 6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채 1년이 안 되는 기간에 약 1000만㎡(300만 평) 규모의 용산 땅 중 약 118만 평이 일제 군용지로 수용됐다. 그나마도 마을 사람들이 수용에 격렬하게 저항해 당초보다 수용 규모가 준 것이다. 용산 일대에 살던 1만4000여 가구의 주민들은 일제에 의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다.

일제 이어 미군이 점령한 용산 기지 
 
용산 일대 자리했던 일본 육군 제20사단 78, 79연대 모습.
 용산 일대 자리했던 일본 육군 제20사단 78, 79연대 모습.
ⓒ 서울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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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일대 자리했던 일본 부대 전경
 용산 일대 자리했던 일본 부대 전경
ⓒ 서울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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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현재 국방부와 전쟁기념관이 위치한 삼각지 일대는 조선을 침탈한 일제의 심장부가 자리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쓴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에 따르면 일제는 기존의 주차군 체제를 바꿔 1915년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해 상주군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린다. 주차군은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해 파견하는 방식이다. 상주군 결정으로 일본군 제19사단이 1916년 4월 용산에서 창설됐다. 이를 바탕으로 1918년 6월에는 조선군주차군사령부가 조선군사령부로 변경됐다. 1919년 4월 20사단이 현재의 국방부 인근에 창설됐고, 기존 19사단은 함경북도 텐진으로 이동 배치됐다. 그 중심에 보병 79연대가 있다.

국방부 옛 청사를 마주보는 현 전쟁기념관 위치에 자리잡은 보병 제79연대는 이른바 '의병진압부대'에 뿌리를 둔 채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제암리 일대에 출동해 '제암리학살사건'의 주범 부대로 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대 만주사변과 1930년대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79연대는 침략전쟁의 선두에 섰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79연대는 한국 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해 전선에 세웠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일제가 만들어 놓은 용산 기지는 그대로 미군의 차지가 돼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져왔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란에 대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군생활을 했던 역사전공자 김아무개씨는 "그곳은 철저하게 통제된 금단의 구역"이라면서 "미군 기지 반환도 언제 다 이뤄질지 미정인 상황에서 '국민 속으로 들어간다'며 용산 국방부에 대통령 집무실을 마련한다는 윤석열 당선인의 말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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