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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니야. 우리는 내려갈 거니까 아래 화살표를 눌러야 돼."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태우러 올라와야지? 나는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엄마."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했던 엄마와의 대화다. 엘리베이터 삼각형 방향을 두고 뭐가 맞는지 실랑이를 벌인다. 여든의 엄마는 여러 모습으로 나를 웃기게도 서글프게도 한다. 가장 난해할 때는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 이름 우기기다. 차인표를 보고 차승원이라고 하고 손예진을 보고 송혜교라고 우긴다. 마트에서는 늘 가격표에서 0을 하나 떼어 읽고는 왜 이리 싸냐고 한다.

아이가 되어가는 여든 엄마
 
드라마 <서른, 아홉> 배우 손예진
 드라마 <서른, 아홉> 배우 손예진
ⓒ JT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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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이러는 건 음... 의도는 없다. 단지 내가 못 받아들일 뿐. 못 받아들이겠는 행동은 식사 때도 나온다. 찌개를 뜬 숟가락이 입까지 오기도 전에 벌서 입을 벌리고 있는 엄마. 이건 나이 많은 어떤 할머니의 모습이지, 내 엄마의 모습은 아니어야 하는 나의 자가당착.

"엄마. 제발 나와서 먹을 때 식탁에 흘린 거는 좀 집어먹지 마."

그러면 엄마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먹던 그릇을 식탁 끝 아래에다 받친다. 그리고 수저로 식탁에 흘린 면을 그릇에 다시 담는다. 엄마는 "봐, 나 집어먹지 않았다" 하는 표정이다. 내가 아주 환장을 한다. 언젠가는 이런 모습도 사무치게 그리울 날이 오겠지만, 엄마는 지금 아이와 엄마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듯하다.

한반도의 모든 여사님들처럼 엄마도 사진 찍을 때는 차렷 자세다. "엄마, 손가락 브이" 이제는 내가 카메라를 들기만 하면 엄마는 브이가 자동이다. 손가락 하트는 한 번에 따라 배웠지만 제주도 여행에서 우리가 뭐했는지는 완전히 까먹고 기억이 안 난다는 엄마. 어떻게 그게 생각이 안 날 수가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한 번은 엄마랑 나란히 걸으면서 산책을 하던 중에 내가 말했다. "엄마, 뒤로 걷는 게 그렇게 운동에 좋다네. 같이 뒤로 걸어보자" 나는 설마 상상도 못 했다. 같이 걷던 엄마가 그대로 뒷걸음질 출이야. 나는 당연히 돌아서서 걷던 방향으로 뒤로 걸어갔으니까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 멀어진 꼴이 되었다. 이런 코미디가 없다. 우린 또 같이 웃었다. 이게 왜 이렇게도 행복할까.

"아름다운 우리 아가씨~. 뭐해?"
"사랑하는 우리 고정미씨. 나 친구들 만나고 있지롱."


통화할 때 엄마와 나는 서로의 애칭으로 시작한다. 누군가 들으면 우리가 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내 지인들은 엄마가 어쩌면 그렇게 소녀 같으시냐며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그렇다. 엄마는 소녀 쪽으로 더 아이 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자꾸만 걸어가신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은 나

근데 내가 이런 엄마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는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타서 19층을 누르고는 왜 안 내려가지 생각한다. 작은방에 들어가서는 내가 여기 왜 왔더라 하는 일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며칠 전에는 해바라기 명화그리기 키트를 주문했는데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물감과 붓이 없는 게 아닌가. 주문내역을 확인해보니 '두꺼비집 가리개 해바라기 그림'이 결제되어 있었다. 이런 바보가 있나.

검색창을 띄워놓고는 순간 "내가 뭐 검색하려고 했었지?" 머리가 하얗다는 게 이거였다. 방금 전에 한 말도 까먹는 나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라며 친구는 구박과 진심을 섞어서 치매보험을 좀 알아보라 한다. 나는 그냥 건망증이고 실수일 뿐이라고 넘겨버리는 중이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려운 것도 아닌 것을 기억을 못 한다. 처음엔 심각한 듯도 했으나 이제는 어지간한 건 그냥 그러려니 한다. 하기야 어제 점심에 뭐 먹었는지를 떠올리려면 잊지 않아야 할 세계사 사건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할 정도이니. 모든 게 전생 같다. 나는 그냥 오늘만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럴 줄 과거의 나는 미리 알았을까? 메모하는 습관이 꽤 오래되어 하는 말이다. 메모는 약속과 계획을 잊지 않고 잘 지키는데 꽤 아니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메모하지 않은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래도 메모는 계속해야겠지? 메모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굴복하지 말자. 순순히 그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자.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며 알게 된,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위해지었다는 딜런 토마스의 시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가 떠올랐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 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건망증, #아이같은엄마,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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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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