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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 푸른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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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남편이 책 한 권을 불쑥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재미있어. 한 번 읽어 봐. 내가 두 시간 만에 다 읽었다니까."

처음 있는 일이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 조금 얼떨떨하게 책을 받아들었다. 책 제목은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다. 남편은 50세가 된 여자의 한 달 제주 여행기라는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왜 여행기가 아니라 유배기야?"
"그건 책을 읽어보면 알아."


희한하다. 남편이 읽어보라고 하니 읽기가 싫다. 공부하라고 하면 하려고 했다가도 하기 싫은 아이의 마음이 이런 건가. 그런데 그 뒤에 나온 남편의 말이 놀랍다.

"자기도 혼자 한 달 제주여행 다녀올래?"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남편은 아이를 케어하는 게 어떤 건지 알까. 내 하루를 쭉 읊을까 하다가 간단히 한마디만 했다.

"오빠가 평일 5일 중에 밤 12시 전에 들어오는 날이 하루 정도인 건 알지?"
"아이는 어떻게든 내가 케어할게."


뭔가 단단히 결심한 느낌이다. 책 속의 어떤 문장이 남편을 건드린 걸까. 하지만 잠시 뒤에 남편은 "음, 그럼 일주일만" 했다가 다시 "음, 맛보기로 2박 3일만"으로 말을 바꿨다. 난 그럼 그렇지, 하며 웃었지만 남편의 바뀐 말과 상관없이 책 내용이 무척 궁금해졌다.

'열심히 살지 않아' 제주로 갔습니다 

책의 저자인 김보리 작가는 부끄러워서 제주도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을 '유배'라고 명했다. 나이 오십에 이뤄놓은 것은 없고 열심히 살지 않은 죄로 유배를 떠난다고. 유배이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면 안 될 일이다.

100만 원 안에서 숙박비와 교통비를 해결하기로 한다. 교통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숙박비는 일일 평균 3만 원을 넘지 않기. 노 카페, 노 맛집. 그리고 채식 지향 식생활. 나름의 유배 규칙이다.

매일 열심히 걷고 김밥과 막걸리가 주식인 저자의 여행을 무척이나 따라 하고 싶다. 유명한 맛집과 가격 대비 최고의 숙소를 찾느라 가기 전부터 진이 빠졌던 내 제주여행과 무척 다르다.

저자가 갔다는 숙소와 서점, 오름을 메모해 놓는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혼자 여행을 하게 된다면, 나도 이곳에 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저자는 런던에서는 잘 입었지만 서울에서는 못 입겠다며 딸이 건넨 초록색 벨벳 치마를 꺼내 입는다. 평소에 못 입던 옷을 입으며 용맹해진다.
 
"낯선 공간에서의 낯선 옷 생활을 딸은 런던에서, 나는 제주에서 소심하나 씩씩하게 누려보았다. 의상탈출이 때로는 일상탈출이다. 나 아닌 내가 될 수는 없지만, 나 아닌 척하는 내가 되어보는 재미는 쏠쏠하고, 훗날 사진을 넘겨볼 때 그 장면은 더욱 도드라진다. 콕콕 눌러 터뜨려 보고 싶을 만큼. (p.27)"
 
머릿속에서 옷장의 옷을 촤라락 펼쳐 일상탈출 의상을 고른다. 후드티셔츠와 추리닝 바지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비건 가죽 자켓이 있다. 그래, 서울에선 입고 갈 곳이 없어 한 번밖에 입지 않은 가죽 자켓을 입자.

음. 이걸 입자면, 봄에 떠나야 하는데. 바로 떠나야 하나? 그런데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왜 이리 겁이 날까. 20대 때에는 혼자 어학연수도 다녀왔는데, 어쩜 이렇게 겁 많은 아줌마가 됐을까.

난 엄청난 길치에 운전도 못 한다. 소극적인 성격이고 낯을 가린다. 혼자 여행 가기 힘든 이유를 대라면 열 개도 더 댈 수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우선은 2박 3일만 해 보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혼자 걱정했다가 괜찮다고 격려하고 다독인다.
 
"어쩌다 나의 한 달 여행을 얘기하니 아주머니 보살님 기막혀하신다. "어이구, 우리 며느리가 한 달을 여행 간다고 하면 우짤라나. 아이고 참." 실은 저희 시어머님도 모르셔요. 어쩌면 댁내 며느님도 모르게 할지도. 책이 나오면 그때에나 책을 들고 가 말씀드려볼까. '어머님, 여행책 내고 싶어서 다녀왔어요.' 모든 걸 다 고하며 살 수는 없다. 정직하지 못한 불효를 조금 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이 행복하게 살면, 결국 그게 더 큰 효도일 거라고 합리화해본다. (p.105)"
 
남자가 한 달 여행을 한다고 말했다면, 과연 누가 이런 반응을 할까. 일방적인 희생이 쌓이면 차츰 억울해지고 그 감정을 보상받으려다 관계가 아주 깨질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화가 났다가 짜증이 올라왔다가 안타까워졌다. 그 말을 한 아주머니는 자신이 그렇게 희생하며 살아오셨겠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삶이다. 그러니 부부라면, 한 사람이 희생하기보다는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살면 좋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난 혼자 여행을 가야겠다. 갑자기 결심이 섰다. 딸에게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빠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아빠가 여행 갔을 때 엄마가 자신을 돌봤던 것처럼 엄마가 여행 가면 아빠가 자신을 돌봐준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우면 좋겠다.

주저하지 않고 떠난다면 
 
"안아주는 마음으로 제주를 걷고, 해처럼 느린 걸음으로 발자국 없이 지구를 스쳐 가야겠다. 적어도 나만의 이동을 위한 탄소발자국은 남기지 않으려 걷고 버스 타며 스치듯 여행하고 있다. 지구가 애틋하고, 내일은 불안하다. (p.115)"
 
채식 위주로 먹고 대중교통을 타며 탄소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다정한 여행이다. 책 속엔 친절하게 대중교통으로 가기 쉬운 숙소가 소개되어 있다. 주저 말고 떠나면 여행도 인생도 저절로 술술 잘 풀릴 거라는 마지막 문장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다.

이 책의 마지막 꼭지에서 이 여행이 왜 '유배'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진정한 이유가 밝혀진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눈물이 난다. 저자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책을 다 읽은 후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자기가 추천해 준 책 진짜 좋다!'

그러고 나서 책에 나온 숙소를 급하게 예약한다. 혹시나 내 마음이,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은이), 푸른향기(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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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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