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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사람을 그리는 어반스케치를 하면서 서울의 조형물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자말]
독립문과 서재필동상. 독립문와 약간 비켜선 서재필 동상의 위치가 절묘하다. ⓒ 오창환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했다. 21세기에 이런 전쟁을 보다니!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바로 항복할 것이라는 전망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비웃듯이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꿋꿋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끼여 있어서 외침도 많이 받고 국가적 정체성이 엷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전쟁의 양상으로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우크라이나는 교류가 극히 적지만, 구한 말에 우리나라 건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우크라이나 출신 인물이 있었다.

서양식 건물에 녹인 한국적 유산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아래 사바틴)은 1860년 1월 1일 우크라이나 폴타바 주(州) 루브니에서 태어났다. 위키백과 등에 따르면, 루브니는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르는 드니프로 강 오른쪽에 있는 도시로 수도 키이우(키예프)와 지금 한창 교전 상황인 하르키우 중간쯤에 있다.

그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고 계모가 그를 괴롭히자, 사바틴은 14살이 되던 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삼촌에게 간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예술아카데미에 일 년간 재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건축학교로 적을 옮겼으나 역시 성적 문제로 그만둬야 했다. 그는 해군 양성소에 입교해 항해사가 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 함대로 임관하게 됐다.

1883년 사바틴은 토목 측량 기사로 고용되어 대한제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후 10여 년간, 즉 그의 나이 20대 중반에서 30대까지 그는 조선에서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건물들을 설계했다.

인천해관 청사, 인천, 1883년 완공,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세관 청사
세한 양행 사택, 인천, 1884년 완공
인천항 부두, 1884년 완공,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접안 시설
만국 공원(현재 인천 자유공원), 1888년 완공,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시민 공원
제물포구락부 빌딩 본관, 인천, 1889년 완공
구 러시아 공사관, 서울, 1890년 완공
경복궁 관문각, 서울, 1891년 완공, 경복궁 북문 근처에 있었던 서양식 3층 빌딩. 일제가 파괴했음
독립문, 서울 서대문구, 1897년 완공, 영은문을 헐고 독립협회 주도로 세움
덕수궁 정관헌, 서울, 1900년 완공,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커피하우스
덕수궁 중명전, 서울, 1901년 완공,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도서관, 파티홀, 을사늑약 조인 장소
제물포구락부 빌딩 별관, 인천, 1901년 완공
손탁 호텔(Sontag Hotel), 서울, 1902년 완공
(이상 위키백과 참조)


중구 정동에 있는 구 러시아 공관은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1년간 집무를 보던 장소였다. 본관은 6.25 때 소실되었고 지금은 전망대만 남아 있다. 독립문을 만들었던 서재필의 의뢰를 받아 독립문도 설계했다.

그 후 덕수궁의 정관헌과 중명전을 설계했다. 그리고 현재 이화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손탁호텔도 그의 손을 거쳤다. 손탁호텔은 2018년에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의 '글로리 호텔'의 모델이다.

사바틴이 졸업장도 없는 무자격자라고 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초기에 러시아 공관을 설계해서 실력을 입증받았고, 이후 설계를 맡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당시 앞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당시 조선에서 서양식 건물을 설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의 설계는 비례가 아름답고 특히 아치를 잘 활용했다. 그리고 서양식 건물에 한국적 유산을 녹여내려는 창의적 노력을 했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의 손에 명성황후가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처자식을 놔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거기서 그는 시베리아 등지와 우랄 지방 등 러시아 곳곳을 방랑하다 1921년 사망했다.
 
독립문 전경. 서재필이 아이디어를 내고 사바틴이 설계 했다. ⓒ 오창환
 
독립문은 1897년에 완공되었다.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조선 국왕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었다. 서재필이 파리의 개선문을 원작으로 기본 아이디어를 내었다고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사바틴이 설계했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원한 이들이 아니라, 청나라로부터의 독립만을 원한 친일파들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정세에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은 곧 일본에게 예속됨을 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작자의 의도이고, 독립문을 바라보는 민중들, 수용자들은 독립문을 일제를 포함한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받아들였다. 3.1 운동 때 태극기 모양을 몰랐던 사람들이 독립문 앞으로 몰려들어 태극기를 그려갔다.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가 나온다. 

서재필과 독립문 

독립문을 그리려고 왔는데, 어떻게 그려야 하나 고민이 됐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독립문을 단독으로 그릴 수도 있고, 영은문 기초와 독립문을 함께 그리면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저쪽에 서재필 동상이 보인다.

서재필 선생은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이었다고 한다. 보통 서재필 박사라고 칭하기 때문에 그를 문인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는 무인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실제로 미국에서 군인으로 복무도 한다. 그는 박사학위(Ph. D)를 받은 박사가 아니라 의사(Doctor)였다.

사람들은 '닥터 서'를 '서 박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 창건을 주도한 인물이며, 한동안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 서소문 배재고등학교 본관에 들어가면 배재를 빛낸 인물들 사진이 쭉 걸려 있었는데, 김소월 시인, 주시경 한글학자,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서재필 선생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쪽에서 독립문 쪽을 바라본 모습. 이 복잡한 광경을 어떻게 프레이밍 할 것인가? ⓒ 오창환
 
수많은 대상 중에 자신의 흥미를 끄는 대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프레임에 넣는 것, 즉 '프레이밍'이야말로 어반스케치의 핵심이다. 그래서 나는 스케치를 하려 가면 '이거다' 하는 것이 떠오를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그것이 결정되면 그다음은 술술 풀린다.

독립문만 단독으로 그려서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신문을 든 동상과 독립문을 한 프레임 안에 병치시킨다면 재미있는 의미를 발생시킬 수도 있고, 보는 사람의 상상력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그림의 프레이밍은 그렇게 결정한다.

그런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동상을 약간 독립문 쪽으로 기울여 그렸다. 그리고 동상 뒤에 있는 눈에 거슬리는 가로등은 생략했다. 

날씨가 따뜻하니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독립문 옆으로 코로나 검사소가 들어서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으러 대기하고 있다. 오미크론이 기승을 부린다. 이 광장에도 평화와 긴장이 병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겠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사바틴, #우크라이나, #독립문,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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