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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기자말]
내 삶은 어지럽지만, ADHD를 뭉뚱그려 아픔으로만 여겨야 할까.
 내 삶은 어지럽지만, ADHD를 뭉뚱그려 아픔으로만 여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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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나만의 맥락으로 해석할 때가 많다. 한번은 동료들과 제주도에 놀러 가서 한 카페에 찾아갔다. 가게에 주인은 없고 작은 칠판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아마도 근처에 있을 거예요.'

나 "아마도가 어디지?" (근처의 어떤 섬 이름일 거라고 생각함)
일행들 "...."


이런 특성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의미를 탐색하지 못하고 정보를 자기 관심사와 즉시 연관 짓는 데서 오는 듯하다. 그 때문에 말을 할 때도 듣는 쪽 입장을 잘 고려하지 못한다. A를 말하다가, B와 C는 머리로 생각만 하고 바로 D로 넘어가 말하는 식이다.

언젠가 지인과 통화 중에 또 그런 일이 생겼다. 나는 머쓱해져서 이런 내 특성에 대해 털어놨다. 그러자 지인이 하는 말. 

"그래서 시를 잘 쓰는구나. 너무 멋지다."

잠시 벙 쪘다. 혁신적인데? 내가 진짜 시를 잘 쓴다고 생각했거나 칭찬에 우쭐해진 건 아니다. 그런데 난 한 번도 이 특성을 장점으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일반적인 생각의 흐름을 뛰어넘는 게 시에서는 시다움이 된다는 말. 일리가 있었다. 부적절함이 도리어 적절함이 될 때도 있는 거다.

ADHD, 여러 방향에서 빠짐없이 둘러보기

ADHD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외출 준비를 하다가 딴짓에 꽂혀 빠듯한 시간에 집을 나서고, 허둥지둥하다 반대 방향으로 뛰고, 뛰다가 신용카드를 잃어버리고, 오는 버스를 확인도 없이 타고, 딴생각에 빠져서 갈아탈 곳을 놓치고, 도착할 때쯤 물건을 안 가져온 게 생각나고, 만날 사람에게 급히 연락하다가 이상한 말투를 쓰고, 다시 돌아가다 보니 겉옷을 정류장에 놓고 온 걸 깨닫고… 이런 식으로 종일 문제를 수습하며 사는 일이 지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사회에서 일관되게 긍적적 시각과 극복의 서사를 강조하는 것은 도리어 병을 가진 사람들을 병에 가두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병과 싸워 이겨낸', '장애를 극복하고'라는 단골 수식어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한편으로 노력에 의한 성공스토리에 초점을 맞춰 개인을 둘러싼 다른 문제들을 지우고, 하루를 다스리기 벅찬 환자들의 걸음을 저만치 앞질러 여기에 깃발을 꽂아야 한다고 채근한다. 

그렇다면 ADHD를 뭉뚱그려 아픔으로만 여겨야 할까. 그것 역시 '병'이라는 분류가 주는 이미지에 갇혀 우리가 겪는 현상의 여러 면모를 지나치는 일이 될 거다. 병을 넘어야 할 산, 증상을 원고의 오탈자 같은 교정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넓은 가능성을 탐색하기 어렵다. 먼저 병을 '현상'으로서 빠짐없이 둘러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ADHD 당사자인 존스홉킨스대학 소아정신과 지나영 교수는 ADHD 증상이 갖는 각각의 장점을 '동전의 양면'으로 역설한다. 모든 성향에는 장단점이 공존하니 ADHD 증상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ADHD인은 늘 실수가 많았으니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대안을 찾을 줄 안다. 정리정돈을 못 하는 점은 주변 여건이 엉성할 때도 적응하는 능력과 같고, 흥미 없는 것에 집중을 못 하는 것은 진짜 관심 분야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국내 3천 사례의 ADHD를 진단한 경희대 의대 반건호 교수는 이분법적 시각 대신 중립적 시각으로 보면 ADHD 특성은 긍정적 성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ADHD의 대표 증상 중 '어릴 때부터 잠이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히던 과잉행동'은 잠재된 에너지가 많은 것으로, 강력한 추진력과 지구력이 될 수 있다. 주의산만은 다양한 연상이나 백일몽, 다중과제 등과 관련이 있어 사고의 틀과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나를 길들인 불편과 대안들

내 얘길 하자면, 물건을 하도 잃어버리니 물질에 대한 집착은 줄고 정신승리 기술은 늘었다.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의 나라'가 있다고 믿는다. 방금 책상 위에 있던 펜, 눈앞에 놓아둔 시계, 서랍에서 꺼낸 적 없는 목걸이와 쌍안경 등은 다른 차원으로 떠난 것이다. 이 현상을 현대과학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

한 달에 7만 원은 '바보 비용'으로 두고 있다. 부주의 때문에 생기는 금전 손실은 내 특별함에 대한 세금이다(왜 7만 원이냐면, 구멍 나는 단위가 대체로 7만 원선이었기 때문이다). 바보 비용을 설정한 뒤로는 마음이 편하다. 행운의 7은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인생 날로 먹으려 하지 마라." 그래서 탈세 없이 잘 내고 있다.

움직이고 싶은 욕구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 집에서 일할 때는 1시간에 한두 번씩 자리를 옮긴다. 책상 앞에 있을 때는 발로 마사지볼과 요가링을 굴리며 일하다가, 실내자전거 위로 가서 노트북이나 책을 보면서 운동을 한다.

강한 움직임이 부족해서 초조해지면 밖에 나가서 욕하는 느낌으로 전력 질주한다. 여의치 않으면 단 10초라도 몸을 마구 흔들어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럴 때 난 내가 봐도 좀 미친 여자다운 무서움이 있지만 혈액순환에는 매우 좋다.

이 밖에도 증상의 부차적 이득은 많다. 틈만 나면 지루함이 파고드는 만큼 소소한 경험들을 많이 쌓았고, 산만해서 멀티태스킹을 사랑한 덕에 인생을 5배로 즐기는 행복도 있었다. 같은 일을 해도 남보다 시간이 많이 드니 점차 중요하지 않은 일과 관계에서 자유로워졌다. 찾아낼수록 하나씩 더 떠오른다. 여태껏 잃은 것에 시선을 뺏겨 얻은 것의 가치를 몰라줬던 걸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더라도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건 좋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족한 현실성을 난 공상세계에서 구축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학생시절 선생님 얼굴 대신 창밖을 쳐다보며 상상하던 세계는 언젠가 쓸 소설의 재료가 될 거다.
▲ 공상의 장점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건 좋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족한 현실성을 난 공상세계에서 구축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학생시절 선생님 얼굴 대신 창밖을 쳐다보며 상상하던 세계는 언젠가 쓸 소설의 재료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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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은 제자리를 돌고 도는 듯 보인다. 사소한 실수에도 좌절했던 건 그 때문이다. "나는 발전이 없다"는 ADHD인들의 무의식까지 잠식하는 명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전두엽 상태는 변함없어도 행동에는 나아진 것들이 많았다. 나선처럼 되돌아가면서 미세하게 앞으로 움직인 느낌이다.

나는 ADHD 확진을 늦게 받아서 빙빙 돌아 길을 찾은 것들이 많다. 지적도 많이 받고, 자기비하도 다짐도 많이 하고, 책과 명상의 도움도 받았다. 지금은 일행과 걷다가 구경거리를 따라 사라지지 않고, 신호를 기다릴 때 횡단보도까지 성큼성큼 나가있지 않는다. 전에는 휴대폰을 쓸 때도 정신없이 눌러 화면이 활어처럼 펄떡댔고 요리할 때도 불난 집에서 귀중품 챙기듯 허둥댔지만, 지금의 나는 훨씬 평화롭다.

행동이 바뀌는 건, 증상과 마음이 서로를 길들일 만큼 투닥거렸을 때 자연히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무리해서 증상을 통제하려 하면 증상이 동반질환까지 불러들여 온 정신을 점거하기 십상이다. 애초에 통제가 잘 되는 증상들이었다면 뭐가 문제였겠는가. '반드시'와 '결코'가 들어간 극단적 사고는 에너지를 소모해 증상을 악화시킨다. "안 되는데 어쩌겠어"와 "나아지겠지" 사이를 하릴없이 오가는 게 차라리 나았다. 달라지지 않는다고 자책하지 말자는 뜻이다.

자신에게 관대해져도 좋은 이유는 또 있다. 개인이 겪는 '불편'의 영역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요구에 어디까지 부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의 사회가 생산성과 집중력, 사회성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신경다양성을 교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건 사실이다(이를 근거로 ADHD를 과도한 분류의 산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얘기는 다음 화로 미룬다). 불편에 책임이 있는 게 당사자들만은 아닌 거다.

진짜 긍정을 하기 위해

'삶을 긍정한다'는 건 삶의 좋은 면만 보는 것보다 삶을 전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 봄가을은 지내기 좋다고 살고, 여름과 겨울은 덥고 춥다고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게 득이 되는 것과 실이 되는 것이 원리를 보면 한 덩어리임을 아는 것. 그렇게 해서 내 삶에 온전히 나를 내어주는 일이다.

병증을 긍정하는 일도 같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벗지 못한 피해의식을 감추느라 쩔쩔매곤 하지만, 그럴 때 생각한다. 내가 한 가지 생각에 빠져있을 때는 언제나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는 걸.

이 '쫌쫌따리(조금씩 매우 적고 하찮은 양을 모으는 모습을 나타내는 신조어) 고통들'은 나를 붙들어 놓기도 했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이 진전시키기도 했다. 앞면을 보여주기도, 뒷면을 보여주기도 하던 내가 시간 속에 닳아 반질반질해지면, 앞과 뒤의 경계는 희미해질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는 나 자신으로서 평온함을 누리게 될 거다.

덧붙이는 글 | * 증상의 장점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반건호 교수의 책 <나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 212-213쪽과 지나영 교수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jinayoung2020/222125511171)를 참고, 요약했습니다.
* 다음 화에서는 '병밍아웃의 난관'에 대해 다룹니다.
* 브런치에도 연재합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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