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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카네의 배웅을 받으며 나가사키 항을 떠난 것은 1884년 5월 27일이었습니다. 목적지는 조선 왕국의 제물포 항이었지요. 첫날 항행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대기는 온화했고 푸른 바다는 잔잔했습니다. 하지만 이튿날은 날씨가 험해졌습니다. 사흘 후인 30일 밤이 되어서야 날씨가 좋아졌습니다.

해안에는 등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날 날이 밝자 이곳저곳 떠 있는 녹색 섬들이 시야에 들어찼고 나는 세상의 어떤 곳과도 다른 이방에 들어왔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바위투성이의 섬에 깎아지른 바위가 솟아 있는 모습이 시선을 끌더군요.

제물포 포구를 향해 50마일의 긴 해로를 항행하는 동안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인가도 생물체 보이지 않는 섬들은 황량해 보였습니다. 

제물포 인근의 정경도 대체로 섬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스산한 느낌이었고 흙은 적황색을 띄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두 척의 소형 정크선을 보았는데 그게 그나마 생기를 주었습니다.

트렌턴호가 마침내 제물포 항에 닻을 내린 것은 5월 31일 오후였습니다. 조선 왕국에 첫 발을 디딘 것이지요. 내가 2년 전 잠깐 부산 땅을 밟았을 때에는 여행자의 신분이었으나 지금은 미국의 해군 무관이자 외교관의 신분입니다. 나의 가슴은 이내 타는 듯한 궁금증과 까닭 모를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마침 그날 저녁 우편물을 나르는 일본 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배 위에서 고국의 부모님께 첫 편지를 썼습니다. 그 첫 머리를 불러내 볼까요?

"사랑하는 부모님께,

저는 기나긴 해상 여정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트렌턴호는 오늘 오후 3시에 서울에 가장 가까운 제물포 항(인천)에 닻을 내렸지요.

우리는 지난 27일 나가사키를 떠났는데 첫 날은 즐겁게 달렸으나 그 후로 어제 저녁까지 날씨가 나빴습니다. 해안에는 등대가 없고 해도海圖도 모두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바다에 떠 있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진 것은 어젯밤이었습니다. 연해의 섬들이 시야에 들어온 후 우리의 배는 닻을 내렸습니디. 다음날 아침에 닻을 올린 배는 쓸쓸한 섬들 사이로 위태로운 수로(tortuous channels)를 따라 서서히 나아간 끝에 오늘 오후 3시에 제물포라 불리는 마을 앞에 다다랐답니디. 제물포는 후미진 포구의 작은 마을로 보입니다. 양옥이 서너 채 눈에 뜨이는군요. 1년 전 그곳은 두 세 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약 1200명이 거주합니다. 대부분이 일본인들이라는군요. ……"


나의 첫 조선 견문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1887년 7월 조선을 떠날 때까지 세 해 남짓 동안에 나는 조선 땅에서 도합 63통의 편지를 부모님께 보냈지요. 우편 증기선이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기록을 통해 한국인 여러분들은 가장 생생한 1880년대의 조선 왕국의 시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개항 초기 조선 왕국의 실상과 숨결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이 기록은 어떤 것 보다도 생생하고 세밀하며 솔직할 것입니다. 이 내용이 한국인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겁니다. 지금부터 그 일부나마 불러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1884년 5월 31일 제물포를 앞에 두고 선상에서 일어난 세밀화를 복기해 봅니다.

트렌턴호는 제물포 항에 닻을 내리자 곧 21발의 예포를 발사했습니다. 헌데 첫 발을 발사하기 직전에 한 명의 외국인이 조선인 한 명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왔습니다. 그 외국인은 조선 정부가 항구 관리 책임자로 고용한 자였고 동반한 조선인은 현지 관리였습니다. 요란스럽고 때묻은 복장을 한 조선 관리를 민영익이 혐오의 눈빛으로 훑어보더군요. 동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종전의 그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포소리가 들리자 지방 관리는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더군요. 그러자 민영익이 혐오 섞인 놀라움을 표출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렌턴호가 제물포에 들어오면 예포에 대한 응대를 위하여 포와 탄약을 준비해 놓으라는 취지로 민영익이 오래전에 트렌턴호 선상에서 조선에 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민영익이 지방 관리를 꾸짖자 그 관리는 그렇잖아도 예포에 답례하기 위하여 포를 준비해 놓았다고 말하더군요. 두 시간이 지나서 예포에 대한 답례로서 둔한 소리가 자욱한 연기와 함께 터져 나오더군요. 긴 간격을 두고 예포는 한 발 한 발  21발이 터졌습니다. 이것이 조선이 외국 군함의 방문에 대하여 터뜨린 최초의 예포입니다. 비록 썩 좋은 예포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최선의 인사였습니다.

배가 정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무리의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배로 건너 왔습니다. 청소부, 팔 물건을 작은 배로 싣고 온 사람, 배의 매점에 넣을 물건을 가져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희한한 일은 그 중에 조선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은 개항장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이 외국인과의 거래를 독점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을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정보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사절들은 그러한 실상을 보고 분노하더군요.

좀 있으니 한 무리의 상급 관리들이 배를 향해 다가오더군요. 민영익과 서광범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26마일 떨어진 서울에서 건너온 것입니다. 민영익이 그들의 모습을 훑어보더니 "너무 더러워서 배에 올라오면 안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해안으로 돌려 보내더군요. 미국에서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조선사절은 오후 5시에 함장의 바지barge선을 타고 15발의 예포를 들으며 트렌턴 호와 고별하였습니다. 그들은 한사코 나와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나는 고사하였습니다. 배에서 챙겨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였죠. 그들은 떠나면서 내게 내일 아침 7시에 한국배를 꼭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날 저녁 9시경에 뜻 밖에도 열 척의 대형 정크선이 몰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배마다 조선인들이 가득 차 있었고 커다란 펠트 모자를 쓴 경찰관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짐을 날라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밤새 왁자하게 잡담을 하며 주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함의 전기불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놀라는 눈빛, 즐거운 눈빛, 호기심 어린 눈빛이 뒤섞이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민명익, #서광범, #제물포, #트렌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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