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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남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천문대인 첨성대가 서 있다. 그래서인지 불국사와 석굴암 못지않게 첨성대 주변에도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첨성대 정남쪽길로 걸어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이 나온다. 신라 건국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 무려 2000년의 역사가 깃든 셈이다.

오랜 세월을 버틴 고목들을 뒤로하면 신라에서 조선시대로 바로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바로 경주향교와 경주 최씨 고택들로 가득한 교촌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라 때의 위상에 못 미치지만, 조선시대 경주도 당시 광역시급의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첨성대부터 조선의 경주 위상을 보여주는 교촌마을까지로 이어지는 길을 가보자. 지난 2월 13일 이곳을 방문했다. 

대릉원 남쪽 외로이 서 있는 첨성대와 김알지의 계림

국보 제31호 첨성대. 이번에는 해 질 녘에 와서 그런지 첨성대를 비추는 보랏빛 조명이 인상 깊다. 이전에는 동양에서 오래된 천문대라고 들었는데, 스톤헨지가 천문대가 아닌 제단이라고 학계에서 주로 말하고 있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서 첨성대는 선덕여왕 2년(633)에 지어졌다고 한다. 1400여 년 동안 축조된 모습 그대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신라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 첨성대 아래에 수많은 건물터 흔적들이 있으니까. 첨성대에 영혼이 있었다면 신라시대에 함께 있었던 동료들이 점점 사라지고 저 멀리 고분들만 남은 모습을 보면서 쓸쓸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첨성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첨성대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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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함께 했던 신라시대 건물들
 첨성대와 함께 했던 신라시대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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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첨성대는 천문대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첨성대 안에 들어가서 별을 관측했을까? 위에 있는 우물 정(井)자형 돌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다시 안쪽으로 내려와서 네모난 창을 통해 별들을 살펴봤다고 한다. 그런데 안이 매우 좁은 것 같다. 게다가 오늘날 천문대는 산에 주로 있는데, 신라 시대에는 왜 평지에 지었을까?

이러한 이유로 천문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신전, 영성(靈星)제단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 심지어는 신라의 높은 과학 수준을 상징하는 건물 등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하지만, 과학이 덜 발달했던 고대에는 별을 살펴보고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 매우 중요했기에, 옛 왕궁 근처에 첨성대가 지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신라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별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전기와 고층건물이 없어서 평지에서 별을 관측하는 일이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첨성대를 오르고 내리는 일은 당대 숙달된 담당자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무질서하게 첨성대를 올라간 학생들의 사진들이 이를 반증한다. 그래서 대다수 학자들은 여전히 첨성대를 천문대로 주장한다.

첨성대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앙상한 가지들로 가득한 숲들이 있다. 바로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鷄林)이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시림(始林)이었는데, 탈해왕 9년 이곳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밝아 호공(瓠公)이라는 인물을 보내 살펴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고. 사내아이의 이름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김(金)씨, 이름은 알지라고 했다. '닭의 숲' 계림 입구에는 순조 3년(1803)년에 세워 이를 기념한 비각이 있다.

그런데 계림의 진가는 김알지 설화로만 끝나는게 아니다. 겨울철이라 잎이 없어서 줄기가 매우 굵직굵직한 것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특히 비각 왼쪽편 무려 1300년의 세월을 버티고 큰 그루터기가 남은 회화나무가 인상 깊다. 수많은 전란을 이겨내고 오랜 세월을 버텨온 숲이라고 해야 할까. 여름에 오면 이곳의 푸르름을, 가을에 오면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경주 생태관광의 가장 중요한 명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300년의 세월을 버티고 그루터기만 남은 계림의 회화나무
 1,300년의 세월을 버티고 그루터기만 남은 계림의 회화나무
ⓒ 최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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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탄생을 기념한 계림비각
 김알지 탄생을 기념한 계림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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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경주 흔적, 경주 최씨 교촌마을

유구한 역사를 지닌 숲을 벗어나면 으리으리한 기와로 된 건물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신라시대를 벗어나 조선시대로 가는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나. 숲길 마지막을 지나면 바로 앞에 대문이 하나 보인다. 현판에는 '경주향교(慶州鄕校)'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향교라면 고려와 조선시대의 국립 지방교육기관이다. 그래서 경주향교 주변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교촌마을이다. 그런데 경주향교의 특이한 점은 통일신라 신문왕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국학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임진왜란 이후 1600년부터 14년에 걸쳐서 재건된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남은 전묘후학 구조다.
 
보물 제1727호 경주향교 대성전
 보물 제1727호 경주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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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97호 경주향교 명륜당. 향교 강학공간이며, 2020년 12월 28일에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보물 제2097호 경주향교 명륜당. 향교 강학공간이며, 2020년 12월 28일에 보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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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바로 왼쪽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인 경주 최부잣집이 있다. 최언경의 손자 9대 최세린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지은 것이 오늘날까지 종가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큰집 앞으로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오늘날 교촌최씨마을을 이뤘다.

종갓집답게 대문을 먼저 들어서면 바깥채가 나를 맞이 해준다. 바깥채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오른편 아래에 있는 정자인데, 외부 손님에 대한 예의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향교와 비교하면 상당히 작은 규모로 아담하게 지어졌는데, 이는 향교에 제향된 선현들 앞에서 겸손함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바깥채 오른편에는 곳간이 하나 있는데, 보통 고택의 곳간은 모내기를 도입하여 수백 석의 쌀을 보관할 수 있는 만석꾼의 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최부잣집이 1907년 경주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자료들이 대거 발견되었다. 또한 후손인 최준 선생은 그동안 쌓은 부를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자금으로 해방 후에는 교육사업으로 전 재산을 바쳐서 의미가 깊다.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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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의 곳간 - 만석꾼 집안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최부잣집의 곳간 - 만석꾼 집안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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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의 육훈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을 보여준다.
 최부잣집의 육훈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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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 안채
 최부잣집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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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에서 교촌마을로 걸어오니 이런 느낌이 들었다. 계림을 통과하기 전 첨성대는 홀로 남아 신라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 2000년 역사의 계림을 통과하고 바라본 교촌마을은 신라 국학이라는 역사로 시작해서 여러 시대를 거쳐 살아남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신라의 화려한 영광이 오늘날까지 완전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조선시대까지 살아남은 교촌이 남아 있어서 위로가 된다. 그리고 최부잣집의 올곧은 가훈과 항일 정신은 시대를 넘어야 하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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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독일에서 통신원 생활하고, 필리핀, 요르단에서 지내다 현재는 포항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행테마 중앙선 연재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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