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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기사 조선 엘리트의 지식 욕구에 감탄했으나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나는 개인적으로 누구 못지 않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당시 서양인들이 지녔던 기독교 절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나는 조선 왕국을 향해 가는 도중에 부모님께 이런 편지를 보냈지요.

"이교도들에게 다짜고짜 당신의 종교는 틀렸다, 당신은 지옥에 갈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말은 허위이고 잔인하며 흉측한 것(monstrous)입니다. 왜냐면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진리가 있고 아울러 나쁜 면도 있기 때문이죠(저는 특히 종교인의 행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내가 3월 28일 인도의 봄베이에서 쓴 것입니다. 우리는 봄베이에서 3월 21일부터 근 2주 동안, 그리고 이어서 콜롬보(실론)에서 5일 동안 머물면서 불교를 관찰하고 현지인들과 불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불교에 관심이 있었고 조선에 가면 한국의 불교 문화에 대하여 관찰해 볼 생각이었지요.

우리는 싱가포르(4월 19-23)를 거쳐 홍콩(5.1-10)에서 열흘간 체류한 뒤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마지막 시련인 듯 우리는 홍콩-나가사키 해상에서 폭풍을 만났지요. 북동풍이 일으키는 격랑 속에서 며칠간 악전고투하였습니다.

어느날 밤엔 배의 안전장치가 파손되어 엉청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와 갑판을 덮어버렸답니다. 가까스로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배를 수리하는데 일주일이 걸렸지요. 우리는 이번 항해에서 우리의 함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5월 17일이었습니다. 그곳은 내게 퍽 친숙한 곳이었고 더구나 나의 일본인 여자친구도 거기에 살고 있었지요.

나가사키에 입항하자마자 내가 맨 먼저 한 일이 무언지 아세요? 조선인들을 그들의 단골 여관에 데려다 주는 일이었답니다. 나는 지난 반년 동안 한시도 그들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는데 이제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들을 여관에 데려다 주고 나서 나는 바로 후쿠야福屋 찻집으로 달려 갔지요. 아름다운 언덕에 자리한 유명 전통 찻집인데 거기에 나의 여자 친구 오카네가 있었지요. 오카네는 찻집 주인의 딸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트렌턴호가 입항할 때 터뜨린 예포소리를 듣고 내가 곧 나타날 줄을 짐작하고 찻집 앞에 모여서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나를 '도진唐人 아니 사마'(honourable foreign older brother)라고 불렀죠.

지난 두 해 사이에 오카네 집안에 큰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카네가 내게 결혼했다고 말했을 때에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재력가인 도이치 나카무라 상의 양녀이자 무남 독녀였는데 양부가 사망하자 친인척들이 남자를 지정하여 결혼을 시켰다 합니다.

나카무라 상의 유산은 무려 약 3만불 상당이었다는군요. 당시 3만불이면 거액이었지요. 나중에 오카네는 결국 홀몸이 되었고 나와 함께 동지사 대학 공동 묘지에 묻히게 되지요. 

내가 난생 처음 한국 음식을 먹어 본 것은 그때 나가사키에서였습니다. 5월 21일 조선인들의 숙소를 방문했는데 뜻밖에도 거기엔 조선인 하인이 한 명 있었고 그가 음식을 만들어 내왔습니다.

그는 원래 나가사키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그즈음 나는 앞으로 조선 땅에서 먹게 될 음식에 대해 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 보니 뜻밖이었습니다. 그 소감을 나는 5월 21일자 편지에 이렇게 적었지요.

"사랑하는 부모님께…….(전략) 오늘 저는 한국인들을 보러 갔습니다. 나를 보자 그들은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더군요(unboundedly glad to see me). ……오늘 그들이 저에게 한국 음식을 주었답니다. 한국 음식이 일반 외국인에게는 맛이 괴상할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매우 맛있었답니다. 일본 음식보다 서양인의 구미에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세상의 어떤 외국인보다도 동방 지역의 모든 삶의 방식에 이상하게도unusually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나는 한국 음식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무척 기뻤습니다. 한국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할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거든요. 이곳 나가사키를 떠나면 저는 진짜 황무지veritable wilderness로 들어갑니다. 이후로는 저의 모든 편지가 생소한 장소에서 발신될 것입니다. …이 편지가 제가 트렌턴호의 사관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서신이 될 겁니다……"


내가 곧 착륙하게 될 조선 땅은 당시 기근과 궁핍 그리고 내외외환에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외국 기업이 진출을 꺼렸죠. 나는 그 정황을 같은 날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곳 일본에서 조선에 대해 알아보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빈발한 기근으로 심한 궁핍에 시달리고 있고 상업은 전혀 발전이 없다는군요. 조선 진출을 서두는 여러 뉴욕 상인들에게 제가 신중을 기하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는데 잘 한 일 같습니다.

교활하고 탐욕스런 유럽 상인들 역시 몸을 사리고 있다는군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처한 조선의 안보가 위태로운 것이 더욱 큰 장애물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다 말씀 드릴 여유가 없지만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꽉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답니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중.일 양국이 모두 조선을 자신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지요…

최근에 조선에 새로운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국왕이 해외를 견문한 사람을 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최고위 관료가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매우 기쁘답니다. 민영익이 유력해지면 저도 그렇게 될 터니까요."


나는 한국 착륙을 앞두고 이렇게 희망에 들떠 있었습니다.

"저는 매우 건강합니다. 몇 달 전에는 좋지 않았지요. 인도양의 찌는 듯한 더위가 사람을 지치게 하기 때문이었죠. 한국 방문을 앞두고 나가사키에서 여독을 풀고 심기일전하고 있답니다. 저는 원기왕성한 상태로 한국에 가서 열심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

태그:#조지 포크, #나가사키, #한국 음식, #민영익, #후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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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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