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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거봐. 내가 잘 어울릴 거라 그랬죠?"

엄청 예쁘다거나, 멋져 보인다는 말도 아니었는데 옷 가게 사장님의 이 짧은 말에 내 지갑이 활짝 열렸다.

평소 옷이 필요할 때마다 찾는 단골 매장이 있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구경만 하다 가도 되는 자유로움. 내가 이 매장의 단골인 이유다. 이 매장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사장님의 고객 맞춤 멘트에 있다. 매장을 찾는 고객에게 현란한 립서비스 대신 상대가 꼭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하는 능력. 무심한 듯 상대의 마음을 꿰뚫는 '관심법'이 그분의 장사 수완이다.

그래도 그렇지, 젊은 시절엔 장삿속이 빤한 말에 거부감이 심했던 내가 '어울린다'는 말 한 마디에 지갑을 활짝 열다니, 왜 이렇게 귀가 얇아졌단 말인가. 고백하건대, 그날 매장에 있던 다른 손님이 피팅 거울 앞에 선 날 보고 "날씬해서 좋겠다"라고 한 말 때문에 그냥 한 번 입어 보려고 한 옷까지 더 사고 말았다. 

붕붕 뜬 기분에 젖어 들여 놓은 그 옷은 안타깝게도 입을 구실을 찾지 못한 채 옷장 밖 구경을 못 하고 있다. 듣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 걸 분명히 아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들떴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모자 매장에서 그다지 필요도 없는 제품을 사고 말았다. 순전히 매장 판매원의 "얼굴이 작아 보인다"는 말 때문이었다. 내 얼굴이 작다는 것도 아니고 모자를 쓰니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었는데, 희한하게 그 말이 "모자를 쓰니 아주 멋져 보인다"는 말로 동시통역되는 이 현상은 도대체 뭘까.

중년에도 남아 있는 인정 욕구
 
듣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 걸 분명히 아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들떴던 것일까?
 듣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 걸 분명히 아는데도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들떴던 것일까?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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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동구매를 방지하기 위해 온라인 구매 시 물건을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가 일주일 뒤에 다시 구매 욕구를 타진하던 '실속 소비형'이었다. 그런 내가 요즘엔 왜 이리 남이 하는 칭찬에 마음이 훅 가서, 지갑을 열고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년의 시기에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아 성찰에 관심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엉뚱하게 타인의 말에 흔들려 충동구매나 하고 있다니. 이 어이없는 내 행동의 원인에 대해 '가심비'라는 말에서 첫 번째 힌트를 얻었다.

'가심비'는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 형태로, 가격 대비 성능을 중시하는 '가성비'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격 대비 심리적인 만족감을 얼마나 채워주느냐에 따라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말인데, 내 마음의 만족도를 높여주던 상품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최대 가심비 제품은 단연코 '건조기'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 퇴근 후 돌아와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운 뒤에야 겨우 빨래를 돌릴 수 있었다. 아파트 1층에 살던 당시, 늦은 밤 베란다에 빨래를 너는 내 모습이 기괴해 보일까 봐, 혹은 초라해 보일까 봐 외로웠던 그 밤들을 위로해 준 게 바로 건조기였다.

잠들기 전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빨래를 욱여넣고 돌려 다음날 아침이면 바로 입을 수 있는 이 혁신적인 제품을,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뒤늦게 구매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지. 가심비 높은 상품이 내 마음에 만족을 주는 건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칭찬에 지갑을 여는 내 구매욕을 다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듯 느껴졌다. 

유명 강사이자 스타트업 MKYU의 CEO인 김미경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중년 여성의 인정 욕구'라는 말을 접하고서야 나머지 해답을 찾았다. 김 대표는 본인이 만든 온라인 학습 플랫폼의 성공 이유를 3050세대 여성들의 '배움의 열정'에서 찾았다.
 
김 대표는 "30대 이상 여성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는 경험이 부족하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어른인지 확인할 공간과 시간이 없는 것이다"라며 "인정받고, 연결되고, 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크다"고 분석했다. - 국민일보, "나를 바꾸고 싶다면 일단 공부부터 시작하라"

듣고 보니 그랬다. 주 1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삶의 윤기가 생긴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연필화로 사물의 명암을 구분 짓는 데는 요령이 필요 없다. 낑낑거리며 가로, 세로 선을 겹치며 정성을 들이다 보면 명암의 티가 나기 마련이다. 우리 삶도 이렇게 정직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선을 그었다.

그래도 제 장소에 알맞은 힘과 강도로 티를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할 즈음, 나보다 최소한 25살은 어려 보일 것 같은 어린 미술 선생님이 "오, 선을 잘 쓰시는데요?"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칭찬의 말에 어깨 뽕이 한껏 올라갔다.

"쫌 놀랬어요"라는 시크한 젊은 선생님의 말소리는 마스크 속이라 작았지만 내 귀에는 확성기에 대고 말한 듯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이거였구나. 인정 받는 느낌! 타인에게 인정받고 있음에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얻는 느낌,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가족들 돌보느라 잊고 살았던 나의 욕구

아들, 딸, 남편의 기를 살리고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칭찬과 인정의 말을 고르는 세월 동안 잊고 살았다. 나도 인정 욕구가 큰 인간이라는 사실을. 하기 싫은 일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 확신도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보려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 점점 '나'라는 쓸모가 없어질까 봐 고군분투하는 것. 그 모든 행위의 기저에 깔린 마음이 '인정 욕구'였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70대 친정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없다. 왜 이렇게 목소리에 기운이 없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내가 이젠 너희들에게 도움 될 만한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아" 하시며 얕은 한숨을 내쉬셨다.

친정 엄마는 손주들이 어릴 때 병치레하느라 며칠 유치원이나 학교를 못 나갈 때면 직장을 가진 딸의 동동거림을 가장 먼저 알고 슈퍼맨처럼 먼 길 달려와 준 사람이었다. 그 손주들이 이제 훌쩍 커서 내가 엄마의 손을 빌릴 일이 거의 없어지는 게 못내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엄마의 쓸모'가 줄어든다니, 가당치 않다. 

엄마는 기쁜 일, 자랑할 일이 생길 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엄마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로 내겐 기댈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괜히 울컥해지는 걸 참느라 목소리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인정 욕구'는 타인에게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하셨지만, 정말 고마운 사람은 나라는 것을 어떻게 더 진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 엄마가 말하기 전에 미리 알아봐 주지 못한 게 못내 죄송했다. 

뒤늦게 내가 겪어 보고 나서야 알았다. 마음을 알아주는 작은 관심만으로도 인정받고 있음을 느낀다는 것을. 지금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내가 먼저 알아봐 줘야겠다. 물론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낙담도 하지 않으련다.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해주는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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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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