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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경북 포항 죽도시장에서 상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황하수 씨.
 40년 넘게 경북 포항 죽도시장에서 상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황하수 씨.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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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경북 포항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오가는 장소는 아니다. 대게와 과메기 등 맛깔스런 해산물이 가득하고, 온갖 농산물과 각종 생활용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죽도시장은 이미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점포 수가 2천여 개에 달하는 대규모 전통·재래시장의 위상을 지켜가고 있는 곳. 바로 그 죽도시장 한가운데서 43년 동안 지역민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철학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명리학자 황하수(85) 원장.

명리학자란 명리학(命理學)을 공부하는 사람. 그렇다면 명리학이란 뭘까? '두산백과'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주에 근거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보는 학문. 태어난 연(年)·월(月)·일(日)·시(時)의 네 간지(干支), 곧 사주(四柱)에 근거해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학문으로 사주학(四柱學)이라고도 한다."

황하수 원장은 1968년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역술인협회 고문이다. 또한, 성명학(姓名學·성명의 좋고 나쁨이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이름을 짓거나 풀이하는 학문) 명인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시장 내에서 '좋은 이름을 짓는 방법을 가진 어르신'으로 통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황하수철학원을 운영하며 현재까지 황 원장이 이름을 지어준 아이들은 무려 3200여 명. 물론 이름을 잘 지어서만은 아니겠지만, 그중 판사도 3명이 나왔다고 한다. 고위직 공무원과 교장 등도 적지 않다.

황 원장은 결혼식을 올리기에 좋은 날짜를 잡아주는 택일(擇日)과 결혼할 남녀의 사주(四柱)를 통해 그들이 부부로서 잘 살아갈 것인가를 예측하는 궁합도 봐준다. 그런 인연으로 50쌍이 넘는 부부의 주례도 섰다.

노점에서 나물 팔아 번 돈으로 손자 이름 지어달라던 할머니

젊은 시절엔 포항과 전남 여수 등지에서 여러 차례 사업을 벌였고, 죽도시장에서 의류 판매점도 크게 했던 황하수 원장.

한때는 남들 못지않게 부자로 살아봐서일까. 지금 그에게선 돈에 연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게 나이 들어가는 기품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 주례를 봤던 결혼식 중 잊지 못하는 사연이 있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부부들이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다. 그런 부부들 17쌍의 주례를 섰다. 물론 사례금은 받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신랑과 신부의 얼굴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 이름을 짓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지만 이름을 짓는 비용은 얼마인가.

"(웃음) 정해진 가격은 있다. 30만 원이다. 하지만, 누군가 찾아와 '돈이 없는데 자식의 이름은 꼭 좋은 걸로 지어주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그걸 매정하게 거절하겠나? 죽도시장 노점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게 기억난다. 그럴 땐 '가진 것만 주시면 된다'고 말한다. 5만 원도 받고, 10만 원도 받는다. 물론, 형편이 좋은 의뢰인의 경우엔 책정된 가격보다 더 주기도 한다."
 
황하수 원장은 한국역술인협회 고문이기도 하다.
 황하수 원장은 한국역술인협회 고문이기도 하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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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포항으로... 우여곡절 85년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적 국가의 모습과 점을 봐주고 굿을 하는 무속인의 집 앞에 걸린 '신장(神將)대'-무당이 쓰는 막대기-는 불협화음으로 느껴졌을 터.

황하수 원장을 포함한 한국역술인협회 회원들은 도시 곳곳에 무분별하게 들어서 있던 신장대를 정리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 일로 당시 내무부장관의 표창도 받았다고 한다.

<사주보감> <성명보감> 등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한 황 원장. 그는 100년에서 15년이 빠지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과 4·19 혁명, 5·16과 12·12 쿠데타, 여기에 산업화시대에서 민주화시대로의 이행을 지켜봤다는 이야기. 그 정도면 개인적 삶에도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몇 가지를 물었다.

- 고향은 어디인가.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의 혼란 속에서 경북 안동으로 이주했다. 초등학교 때였다. 젊은 시절에 포항으로 와서 사업도 하고, 명리학도 공부하고, 철학원도 차려 지금까지 살고 있다."

- 아직도 중국에 형제가 남아있는지.

"형님의 아이들이 중국에서 살았다. 40년 넘게 소식이 끊겼다가 이산가족을 찾는 전국적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그들을 만났다. 이후 한국으로 불러 국적을 취득하는데 도움을 주고 취직도 시켜줬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정말이지 어렵게 살았는데 이제는 김치공장 사장 등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으니 숙부로서 흐뭇하고 기쁘다."

- 오랜 시간을 시장 사람들과 함께했다. 이곳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나이쯤 되면 누구라도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시장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 있거나, 예기치 않은 송사(訟事)에 휘말릴 땐 변호사나 법무사도 소개시켜주고 그랬다. 1990년 병을 앓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재혼하지 않고 아들 넷을 혼자 키워 결혼시켰다. 그 세월 동안 왜 어려움과 고충이 없었겠는가.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다 수난과 시련을 겪으며 산다. 그걸 극복하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줬던 게 보람으로 남았다."

인자하게 나이 들어가는 동네 할아버지처럼...

30년 넘게 어머니 없이 자신들을 키워준 아버지의 노고를 알았던 것일까. 황하수 원장의 네 아들 모두는 열심히 살고 있다. 장남은 대기업 상무를 지냈고, 아래 동생들도 무역회사 등에서 세상이 자신에게 맡긴 몫을 다하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황 원장은 말한다. "귀하고 천한 직업을 나눌 필요 없다"고. "돈은 있다가 허망하게 사라질 수도 있지만, 수양한 인격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

열일곱 살 때부터 한문을 공부한 황 원장은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오래전 스승으로부터 사주의 기초를 배울 때부터 현재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다짐은 "나는 미신에 기대 점을 치는 게 아닌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로 나이 들어가는 그의 잔잔한 미소를 보면서 시인 백석(1912~1996)의 단아한 시 '선우사(膳友辭)'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런 노래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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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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