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4 14:27최종 업데이트 22.03.0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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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러시아군 폭격으로 TV 송신탑에 불길이 치솟고 있다. 현지 언론은 여러 차례 폭발음이 들린 후 TV 방송이 중단됐다고 전했다. 2022.3.1 ⓒ 연합뉴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불과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각 국 대표들과 돌아가며 회담을 열고 협상의 여지를 남겼던 러시아는 급작스러운 전쟁으로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러시아가 정말로 침공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러시아에 뒤통수를 맞은 유럽의 충격은 매우 크다. 무엇보다 유럽 땅에서 다시 세계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러시아의 예측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강하게 저항하면서 유럽과 서방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 등은 현재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하지 않지만 무기 및 자금 지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경제, 정치, 문화 등 전방위 제재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있다.

독일 총리 "시대 전환" 
 

이와 관련 러시아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독일의 태세 전환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독일은 러시아와 직접 연결된 천연가스관 노드스트림2 사업 등의 문제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독일 정부는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인 1월 말 방어 및 공격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우크라이나에 "군용 헬멧 5000개를 보내겠다"라고 발표해 웃음거리가 되었다. 독일은 살상 무기를 보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독일의 저자세에 러시아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독일은 러시아의 침공 직후에도 경제 제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국제 사회와 시민들의 비판이 커지던 상황.


지난 2월 26일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 1000정, 지대공 스팅어 미사일 500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이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시대 전환(Zeitenwende)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전후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침략군에 대한 방어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최대한 지원할 의무가 있다"라며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편"이라고 강조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27일 연방의회에서 "효율적이고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독일 연방군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이라며 국방비 증가 및 재무장을 약속했다. 2022.2.27 ⓒ Bundesregierung

 
다음날인 27일 숄츠는 독일 의회 연설에서 "효율적이고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독일 연방군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이라며 국방비 증가 및 재무장을 약속했다. 올해 일회성으로 방위금 1000억 유로를 증액하고, 앞으로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기로 했다.

GDP 2% 국방비 지출은 나토가 2012년 결의한 내용이지만 독일은 이를 계속 미루어 왔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 독일은 군사력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런 독일이 명시적으로 국방비 예산 증액과 재무장을 발표한 것이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과 러시아 제재를 가장 늦게까지 망설인 국가였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국제은행거래 시스템인 스위프트 제재에도 반대했던 독일. 26일을 기점으로 독일은 결단한 모양새다. 

급속히 결속하는 독일 사회

러시아의 침공 이후 독일은 가장 먼저 노드스트림2의 승인 절차를 중단했다. 그동안 독일의 결정과 방향성에 발목을 잡아왔던 러시아산 에너지와 가장 먼저 '손절'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독일은 자국에서 사용하는 천연가스의 55%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한다. 러시아에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가장 큰 에너지 시장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을 통해서 서유럽으로 연결된 가스관과 북해를 통해 독일로 바로 연결된 가스관 노드스트림1로 이미 가스를 수출하고 있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이 운영하는 노드스트림2는 1과 거의 같은 경로로 이미 완공되어 승인만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노드스트림2가 운영되면 유럽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지고,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독일 메클렌부르크 포어포메른(Mecklenburg-Vorpommern) 지역의 노드스트림 2 파이프 라인. 독일은 노드스트림 파이프 라인을 통해 연간 550억 입방미터의 천연가스를 러시아에서 들여올 수 있다. ⓒ 연합뉴스

 
특히 미국이 완강히 반대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며 기업 제재까지 하면서 노드스트림2 사업을 막았다. 하지만 미국도 자국의 가스를 유럽에 수출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독일과 러시아가 '순수한 경제적 사업'이라며 노드스트림2를 강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겨울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에너지 안보 위기가 실제로 다가왔다. 독일 내 가스 저장소 충전 비율은 평소 80%를 유지했는데 2월 기준 30% 대로 떨어졌다. 러시아가 일부러 가스 공급을 줄이고 있다는 의혹이 점점 더 커졌다. 독일의 위기감도 높아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 러시아산 가스가 필요한 독일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호히 정리할 수 없었다. 

'푸틴의 전쟁'을 계기로 독일은 어물쩍하던 러시아와의 관계에 단단히 선을 그었다. 숄츠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며 발표한 재무장 선언에 에너지 안보를 주요 메시지로 전했다. 

숄츠 총리는 27일 "에너지 공급처를 다각화하고 현재 건설 중인 액화 천연가스 터미널을 신속히 완공하겠다"라고 밝혔다. 동시에 재생에너지 확대에도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미국산 가스를 수입하고, 재생에너지를 통해 하루빨리 에너지 자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다.

앞서 독일 경제 및 기후보호부 장관 로베르트 하벡은 탈원전과 탈석탄 기한 연장에 대해서도 '금기는 없다'라고 말했다. 물론 '부정적인 선택지'라는 전제를 깔았다. 녹색당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발언은 현재 독일이 이 사안을 얼마나 무겁게 보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독일의 단호한 결단에는 독일 사회의 강력한 지지도 뒷받침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첫 주말인 지난 27일 베를린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는 약 50만 명이 참여했다. 집회 신고 시 예상 참석 인원은 2만 명이었다. 예상 밖 인파에 독일 스스로도 놀란 모습이었다. 독일 주요 정당과 주요 정치인, 노조, 평화, 인권, 환경 관련 시민단체도 모두 쏟아져 나왔다. 
  

지난 2월 27일 독일 공영방송 뉴스 타게스샤우에서 보도한 베를린 반전 시위. 약 50만 명이 참여해 전쟁 중단과 유럽의 평화,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 tagesschau Facebook

 
독일의 서비스 노조인 베르디 대표는 "오늘 데모는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연대하는 강력한 신호"라면서 "이제 독일의 과제는 유럽의 평화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갈등을 군대로 해결하는 것은 문명사회에 맞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재생에너지 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도 많았다. 유럽의 에너지 자립을 속히 이루고,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는 것은 푸틴에게도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독일 사회의 결속이 러시아를 향한 독일의 태도를 바꾸게 됐다. 

숄츠는 "푸틴의 전쟁은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그간 독일이 지향했던 가치와 질서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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