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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나이 오십을 앞두고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집에만 있는 주부였지만 조용히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늘 아쉬웠다. '내 방'이 따로 없으니 주로 식탁에서 글을 썼다.

밥을 먹을 때마다 노트북을 치우고 책을 한 옆으로 밀어 놔야 했다. 책을 보기에는 식탁 조명이 어두워서 책상용 스탠드를 가져다 두며 나름의 공간을 꾸며 보았지만, 글 쓰는 살림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식사 때마다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도 늘어났다.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세 자매도 식탁에서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같은 명작을 썼다지만, 나는 읽고 쓰는 나만의 공간을 간절히 원했다. 

식탁이 책상이 되면 벌어지는 일
 
밥을 먹을 때마다 노트북을 치우고 책을 한 옆으로 밀어 놔야 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노트북을 치우고 책을 한 옆으로 밀어 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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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자 흩어지면 '일단 살림은 미뤄두고 글부터 써야지!' 하고 식탁에 앉아보지만, 밤새 거실 위에 가라앉은 반려견의 털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질끈 감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부스스 일어나 청소기를 돌린다.

그러고 나면 바닥에 얼룩이 보여 물걸레를 돌린다. 그러고 나면 주방 개수대에 쌓여 있는 아침 식사 설거지가 보인다. 그러고 나면 저녁 거리가 걱정돼 장을 보러 간다. 또 그러고 나면... (짐작하실테니 길게 덧붙이지 않겠다)  

깨끗하게 정리정돈 된 집, 맛있고 따뜻한 집밥, 빳빳하게 다림질된 옷. 내 무의식 속 주부의 역할에 대한 주문이 끝없이 밀려왔다. 다 마른 빨래는 바로 걷어야지. 개킨 빨래는 왜 빨리 제자리에 넣지 않니. 참, 지난 계절 옷 정리는 다 한 거야? 거실 장 먼지 좀 봐!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인류학자 김현경의 지적대로 "마치 그렇게 끊임없이 청소하지 않으면 주부의 자격이 없어진다는 듯이,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조건으로만 집에 있을 권리가 생긴다는 듯" 말이다.

온종일 집안을 종종거리고 다니지만, 독립된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이 문득문득 서글퍼지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글쓰기는 늘 뒤로 밀렸다.

여성 작가 35인의 글 쓰는 공간을 모은 타니아 슐리의 책 <글 쓰는 여자의 공간>에서도 많은 여성 작가가 '자기만의 방'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 작가들은 어떻게든 집에서 글을 쓸 공간을 만들었다.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은 어린아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식기와 빵 조각이 어질러진 부엌 식탁에서 글을 썼고, 중국 작가 장지에는 화장실 변기 위에 널판때기를 올려놓고 앉아 60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썼다.

나 역시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시간'이나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내 책상이 생겼다!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사택에서 사용하던 책상을 집에 가져온 것이다.

나는 시야가 가려지도록 거실 구석에 책상을 놓았다. 애들은 지나가면서 '엄마도 방이 있어야 하는데……'라고 하지만 나는 책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다. 나이 오십에 '나만의 책상'이 다시 생긴 기쁨을 가족들은 알까?

내 책을 쌓아두어도 되고 번거롭게 매번 노트북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 책을 읽다가 펴놓고 다른 일을 하다 되돌아와도 내 자리는 그대로 있다. 다이어리가 가까이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메모할 수 있다. 필기구, 테이프, 플래그 등 작은 문구류도 손닿는 자리에 있으니 편하다. 학생 시절 내 책상이 있었을 때는 당연했던 것이, 지금에서야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내 책상이 생기고 달라진 변화
 
나이 오십에 얻은 기쁨, '나만의 책상'을 갖기를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다.
 나이 오십에 얻은 기쁨, "나만의 책상"을 갖기를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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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이 있으니 코로나 시대에 이제 일상이 된 화상 모임도 부담이 없다. 식탁이 있는 주방은 가족들이 자주 오가니 화상 모임이 있으면 빈 방을 찾아 옮겨 다녔다. 특히 듣고 싶은 실시간 화상 강의가 저녁 시간이면 방이 비질 않아 자주 포기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낮이든 밤이든 책상에서 이어폰을 끼고 여유롭게 화상 모임이나 강의에 참여한다.

무엇보다 글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 글은 손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더니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수록 어쨌든 무언가를 쓰는 시간이 늘어난다. 가족들도 내가 책상에 앉아 있으면 되도록 말을 걸지 않으려고 한다. 벽으로 가려지지 않아도 책상 하나로 나는 독립된 공간 속에 있게 되었다.

책 <아무튼, 서재>에서 목수(木手)이자 작가인 김윤관은 말한다.
 
나는 서재와 책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 되도록 크고 넓은, 당신이 당신의 생각과 사물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는 크고 넓은 책상을 가져보라고. 세상에서 당신이 온전히 당신 자신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이 뜻밖에도 그 책상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 46쪽
 
나이 오십에 얻은 기쁨, '나만의 책상'을 갖기를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다.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책상에서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해도 충분하다. 어떤 이는 단정한 책상에서 조용히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며 차를 마시겠고, 어떤 이는 뜨개질이나 캘리그라피 같은 취미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도 식탁이나 거실 소파, 안방 침대가 아닌 '내 책상'에서 하면 감각의 결이 달라진다. 집안에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가 아닌 오롯이 '나'에게로 돌아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니까. 게다가 책상에서 쌓은 경험과 펼쳐진 생각 속에 당신 인생의 후반전을 빛나게 할 보석이 숨겨져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중년, #50대, #책상, #글쓰는여자들의공간, #아무튼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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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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